김정은 정권이 '하노이 노딜' 이후 취한 것으로 알려진 문책·숙청의 수위와 범위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당초 외교가에선 "북한이 외부 시선 등을 의식해 회담 관계자들에 대한 극단적 처벌은 자제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만큼 회담 결렬에 따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분노와 상실감이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소식통 "김혁철 생사불명, 신혜영도…"
하노이 회담의 실무협상을 담당했던 김혁철 전 국무위 대미 특별대표는 현재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회담 결렬 직후 원래 소속 부서인 외무성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췄다.
지난 4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대의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대북 소식통은 "김혁철은 미측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협상 상황 보고를 부실하게 했다는 이유로
미제 스파이로 몰려 지난 3월 외무성 간부들과 함께 조사를 받고 평양 미림비행장에서 처형당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베트남 주재 북한 대사관 경제 참사와 2등 서기관, 북한 외무성에서 베트남
업무를 담당했던 서기관 등 4명도 김혁철과 함께 처형당했다는 복수의 첩보가 수집됐다.
특히 하노이 회담 당시 김정은의 통역을 맡았던 신혜영은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혜영은
지난해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이연향 국무부 통역국장)을 대동한 점을 의식해
김정은이 직접 발탁한 인물로 알려졌다.
'실전' 경험이 부족한 신혜영은 통역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신혜영은 '노딜'을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이 다급하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고 말한 것을
통역하지 못했다.
◇"김영철도 위험…김여정은 근신"
대미 협상을 총괄했던 김영철은 당 통일전선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자강도에서 '혁명화 교육'(강제 노역 및
사상교육)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혁명화 조치를 당한 최룡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은 일정 기간
후 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신문이 이날 '혁명의 준엄한 심판'을 언급함에 따라 김영철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김영철의 참모 역할을 수행한 김성혜 통전부 통일책략실장도 정치범수용소행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유일한 여성 대남 일꾼'으로 꼽히는 김성혜는 작년 2월 평창올림픽 참석차 방한한 김여정을 밀착
보좌한 인물이다. 지난 1월 김영철의 방미(訪美)에 동행한 데 이어 2월 평양(6~8일)과 하노이(21일~25일)
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등과 만나 정상회담 직전까지 비핵화 의제를 조율했다.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은 외부 활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하노이 회담을
비롯해 김정은의 외국행에 대부분 동행했지만 지난달 김정은의 방러 때는 보이지 않았다.
외교 소식통은 "김여정이 작년 2월 임신 상태로 강도 높은 방한 일정을 소화했고, 출산 후에도 북·중, 남북,
미·북 정상회담을 연달아 챙기면서 건강에 무리가 왔다"며 "결핵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김여정이 건강 문제보다는 '튀는 행동'이 문제돼 근신 중이라는 관측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하노이 회담 당시
재떨이를 들고 김정은 시중을 드는 장면이 일본 언론에 노출되면서 북 내부에서 '부적절한 처신'이란 말이 많았다"며 "회담 결렬로 체면을 구긴 김정은이 이런 기류를 의식해 김여정에게 '자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이처럼 '하노이 회담팀' 상당수가 각종 문책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외무성의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은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이들은 회담 결렬 직후부터 '김정은의 심기와 육성'을 대외에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다. 최선희의 경우 지난달 부상 에서 제1부상으로 승진한 데 이어, 차관급으로는 유일하게 국무위에도 진입했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작년에 갑자기 대미 협상 업무를 맡은 '통전부 라인'의 낙관적·희망적 보고와 달리, 전통적으로 북핵·대미 협상을 전담했던 외무성 라인은 김정은에게 줄곧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다"며 "하노이 노딜 이후 김정은이 다시 외무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