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속 여행지를 찾아서
목포는 눈물의 도시입니다. 일제 강점기엔 식민지 수탈의 고통이,
해방 이후엔 지역 차별의 분노가 바다처럼 짜고 태양처럼 뜨거운 눈물로 흘러내린 곳.
‘목포의 눈물’은 그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가수 이난영이 1935년에 부른 이 노래가 ‘유행가’로서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 시절 흔적이 도시 곳곳에 여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로 포장된 그 시대의 자취와 그 속에 담긴 설움의 정서가 막혀 있던
눈물샘을 기어이 건드립니다. 여행자에게도 목포는 눈물의 도시입니다.
목포의 산바람은 애매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과 수시로 몸을 섞으니,
이마를 간질이는 것이 산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모호한 것이 어찌 그것뿐일까요.
계절의 길목에 서면 언제까지가 여름이고 언제부터가 가을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강 하구에 가면 어디까지가 강물이고 어디부터가 바닷물인지 경계 짓기 힘듭니다.
구별이나 구분을 일삼는 건 사람이지 자연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선명하게 분별 되던 것들이 문득 수상해집니다.
유달산에 흐르는 목포의 눈물
먼저 ‘바람이 애매한’ 그 산으로 갑니다.
목포의 옛 도심에 서있는 유달산은 높이가 해발 228m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산세의 위용은 여간 당당한 게 아닙니다.
일등바위ᆞ이등바위ᆞ삼등바위ᆞ마당바위ᆞ 얼굴바위ᆞ고래바위ᆞ거북바위….
기묘하게 생긴 각각의 바위에 올라서면
목포 시내와 목포 앞바다가 저마다의 각도로 시선에 잡힙니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눈부신 수채화 같다면,
나날이 쇠락하는 옛 도심이나 빽빽이 들어선 달동네의 집들은 애틋한 흑백 사진 같습니다.
늙은 도시의 낮은 산에서 수채화의 아름다움과 흑백 사진의 그리움을 동시에 맛봅니다.
유달산엔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 무명 시인 문일석이 작사한 ‘저항’의 노래입니다.
OK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애향 가요 가사 현상 공모’에서 1등의 영예를 거머쥔 작품으로
이듬해 무명 가수 이난영이 음반으로 취입하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눈물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시대, 열아홉 살 소녀 가수의 애절한 노래는
민족의 눈물을 닦아주는 한 장의 손수건이었습니다.
시름을 잊게 하는 한 잔의 술이었고, 통증을 견디게 하는 한 알의 진통제였습니다.
‘무명’들이 이뤄낸 치유의 마법이었습니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 ‘목포의 눈물’ 2절
‘목포의 눈물’ 속 저항 정신은 2절 가사에 함축돼 있습니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유달산의 관문입니다.
삼백 년이 지났어도 이 봉우리엔 임 자취(이순신 장군의 넋)가
뚜렷이 남아 있음을 은밀하게, 그러나 위대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최고의 ‘위로가’로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이 노래가 존재합니다.
‘목포의 눈물’이 불후의 명곡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옛 도심, 박제된 아픔의 거리
예술공원으로 거듭난 노적봉에서 아랫길로 조금 내려가면
목포를 눈물의 도시로 만든 일제 강점기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마주치는 곳은 1900년에 지어진 구 목포 일본영사관입니다.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에 침략의 발톱을 숨기고 있는 이곳은
1907년까지 영사관으로 쓰이다가 이후 목포이사청, 목포부청,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으로 이용됐습니다.
건물 뒤편 산 밑엔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파놓은 82m 길이의 방공호가 있습니다.
굴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강제 노역에 동원됐을 목포 시민의 고통이 전해져옵니다.
여기에서 목포 근대역사관까지는 걸어서 2분 거리입니다.
1920년대 목포의 모습과 일제의 침략 상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는 이곳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던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건물입니다.
쌀, 목화, 소금. 삼백(三白)의 고장인 목포는 전국의 척식회사 지점 가운데
가장 많은 생산물을 빼앗긴 곳으로 전해집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됩니다.
우리는 역사를 잊어도 역사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는 걸 새삼 생각해보는 여행길입니다.
목포 근대역사관 맞은편엔 지은 지 90년이 넘은 일본식 가옥이 있습니다.
소리 없이 낡아가던 이 집은 아름다운 카페로 변모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용도는 변했지만, 집도 정원도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전에 살던 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놓은 게 8년 전 일이에요.
이 집이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생활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이잖아요.
일종의 문화 자료인 셈인데 새 주인이 집을 헐고 새집을 지으면
어쩌나 자꾸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덜컥 매입했어요.
이왕이면 여러 사람에게 이 집을 보여주고 싶어서 카페로 만들었죠.
카페 주인 이영철 씨는 ‘예정에 없던’ 일을 하며 살게 된 지금이 아주 즐겁습니다.
불현듯 찾아온 삶의 기회에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내맡기는 사람. 행복은 주로 그런 이들의 몫입니다.
근대 건축물들이 있는 중앙동에서 바다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그 끝에 목포항이 있습니다.
1897년 개항 이래 오랜 세월 전국 3대 항으로 손꼽히던 이곳은 이제 옛날의 그곳이 아닙니다.
옛 명성을 잃은 항구에서 옛 노래를 부르며 바다를 봅니다.
‘목포의 눈물’에서 ‘목포는 항구다’로 콧노래를 이어가니 이별의 설움이
망향의 슬픔으로 물 흐르듯 건너갑니다.
‘목포는 항구다’는 1942년에 발표한 이난영의 또 다른 히트곡입니다.
다른 듯 비슷한 두 노래가 그리움의 파도를 몰고 옵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목포의 눈물’ 1절
영산강 안갯속에 기적이 울고 /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 ‘목포는 항구다’ 1절
생명을 품는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이제 이난영의 생가터가 있는 양동 육거리로 갑니다.
말이 좋아 육거리지 이곳은 사방으로 골목이 나 있는 주택가 언덕의 꼭대기입니다.
근대화의 미명 아래 식민화가 가속화되던 1916년, ‘달동네’란 이름이 어울리는 이 언덕에서
이난영은 태어났습니다. 생가터엔 동상과 노래비만 있죠.
옛집을 복원할 만큼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까닭입니다.
양동은 개항 이후 선교사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입니다.
옆집의 도마질 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려왔을 이 작은 집에서,
어린 이난영은 이방인의 축음기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0년 전만 혀도 길이 좁아 차가 못 들어오니께 연탄이고
쌀이고 죄다 리어카로 실어 날렀당께. 지금이 편허기는 헌디,
살기는 옛날이 더 좋았던 거 같어.
초상도 같이 치르고 제삿밥도 나눠 먹고 그랬응께.
길 넓히믄서 이사 나간 이웃이 태반이여. 그때가 그립고 말고제.
근처에 사는 이선심 할머니는 길이 좁았던 시절의 양동 육거리를 애틋하게 추억합니다.
길이 넓어지면서 사람과 멀어진 것이 할머니만의 일은 아닙니다.
‘편리’를 얻은 대가로 우리가 잃은 것들이 불현듯 사무치게 아쉬워집니다.
이난영은 열두 살에 이곳을 떠난 뒤 삼촌 댁의 더부살이 아이로,
일본인 가정의 아이보개로, 유랑 극단의 막간 가수로 떠돌았습니다.
이후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고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등 굴곡진 생을 외롭게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삼학도의 양지바른 언덕에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41년 만인 2006년에 고향 목포 삼학도로
돌아와 배롱나무 아래 편안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돌아올 곳으로 돌아와 온갖 생명을 보듬으며 또 한 번의 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때마침 피어난 배롱나무꽃 위로 지친 새 한 마리가 쉬어 갑니다.
이난영(1916~1965)
본명은 ‘이옥례’로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가수다. 1935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으며
광복 후에도 대중가수로 활약했으나 6ᆞ25전쟁 때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이 납북되는 등 비운의 삶을 살았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해 블루스, 재즈 등에도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목포 예술 기행
목포는 ‘유흥’의 도시이기 전에 ‘예향’의 도시입니다.
예술계의 거장들이 이곳에 서 무수히 태어났고 그들이 심은 예술의 향취가 도시 곳곳에 여전히 그윽하죠.
목포가 낳은 예술가나 목포에 있는 예술 공간엔 유독 ‘최초’의 이름이 많습니다.
오래된 항구 도시에서 예술의 처음을 생각해봅니다.
목포문학관
참으로 어마어마한 수식어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 우리나라 여성 소설가 최초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박화성, 우리나라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차범석. 목포문학관은 목포가 낳은 3인의 거장과
그들을 주축으로 한 목포문학을 조명하기 위해 2007년 문을 열었다.
2010년 우리나라 평론문학의 독보적 존재인 김현이 그 대열에 합류하면서
‘국내 최초 4인 복합문학관’이란 이름으로 거듭났다.
유달산조각공원
1982년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으로 목포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이등바위 아래 자리하고 있다. 관
람로를 새롭게 정비하고 외국 작품을 추가로 설치해 2008년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내외 조각작품을 포함해 모두 46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며,
조각 하나하나가 유달산의 자연경관과 기막히게 조화롭다.
눈부신 자연과 아름다운 조각품, 정겨운 목포 시내가 어우러진 모습 자체로 거대한 미술관이다.
남농기념관
한국 남종화의 거장이자 운림산방의 3대 주인인 남농 허건이
선대의 유물을 보존하고 남종화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한 미술관이다.
남농 허건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의 친손자이자 역시 유명 화가인
미산 허형의 넷째 아들로 평생 목포에 머물며 한국화단의 중심을 지켰다.
남농기념관에 가면 운림산방 3대의 작품은 물론이고 조선 시대 유명 화가의
작품과 현대 중견 작가들의 작품 30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
1937년 목포에서 태어난 장주원은 1996년 우리나라 최초로
옥공예 부문 중요 무형 문화재가 된 이 도시의 명인이다.
옥의 종주국인 중국의 기술과 작품성을 능가한다는 평과 함께 옥
장을 넘어 신장(神匠)이란 칭호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그의 옥공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관이자 그가 보유하고 있는
전통옥공예 기능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전수관이다.
옥공예를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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