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시마네현의 고지(告知)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1905년) 2월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한다는 조례를 3월19일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2월23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高野紀元) 주한 일본대사가 외신과의
회견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해 우리 국민의 분노를 샀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진귀한 사진이 다량 발견되었다.
김씨는 오랫동안 광고사진 작가로 활동해왔고 최근까지 중앙일보문화센터에서
사진 기술을 강의해온 원로다. 독도 탐사 직후 발간된 당시의 한국산악회 회보에는
김씨가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렸고, 이를 복사한 사진이 지금까지 유통돼 왔다.
그러나 김씨가 갖고 있던 원판 사진은 단 한 번도 공개된 바 없다.
김씨는 지난해 3월26일부터 4월4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80세 기념 작품전을
열며 이 원판 사진을 공개했으나, 어떤 언론도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주간동아와 접촉해 이를 최초로 공개했다.
김씨 사貶【�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한자로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
(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쓰인 2m가 넘어 보이는 나무 말뚝을
한국산악회 회원들이 뽑아내는 장면(사진 맨 위). 기록에 따르면 이 나무 말뚝은
6·25전쟁 발발 2년째인 1952년 6월25일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의 수산시험선을타고 독도에 상륙한 9명이 박았다고 한다(김씨는 “이 말뚝이 나무로 제작돼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치군은 69년 지금의 오키군 隱岐郡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홍 회장은 ‘이 표석은 넓이가 두 자가량, 높이는 자가웃, 부피는 한 자 조금 못 된다’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한 자는 약 30.3cm이다) 한국산악회는 이 말뚝을 뽑아낸 다음 위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도와 獨島’를, 아래에는 국제 해도에서 독도를 지칭하는
LIANCOURT(리앙쿠르)란
프랑스어를 파넣은 화강석을 설치했다.뜻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었다. 대신 한국산악회는 표석 옆면에 표석을 실제
세운 날인 53년 10월15일을 추가로 새겨넣었다.
‘15th AUG 1952’(1952년 8월15일)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김씨는 ‘국제보도’란
이름의 월간지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막역한 사이였다. 때문에 송 사장은 한국산악회가 행사를 열 때마다 김씨를 보내
사진을 찍게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김씨는 한국산악회의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에
참여한 유일한 사진기자가 되었다.
맨 앞줄의 모자를 쓰고 사진기를 멘 이가 김한용씨. 한국산악회는 조선산악회란
이름을 쓸 때부터 독도 영유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과도정부 소속의 울릉도·독도 조사대의
신석호, 이봉수씨와 함께 해군의 전신인조선해안경비대의 ‘대전환(大田丸·당시는 일본식이 짙게 남아 있어 함정을 환이라 했다.
조선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 명의로 푯말을 세웠다(1차 조사).
측지반이 동도 정상으로 올라가며 측량하고 있다.
시험선 ‘시마네마루(島根丸)’가 독도 주변의 우리 영해를 침범하는 일이 있었고,
한 달 뒤인 6월25일에는 미국 성조기를 단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9명을 상륙시켜 문제의 나무 말뚝을 박았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광복 이후 일본인이 독도에 상륙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일어난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희생된 어민 14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설치한
‘독도어민조난자위령비’를 때려 부쉈다고 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독도와 LIANCOURT란 문자를 새긴 화강석을 세웠다고 분명히 밝혔고, 김씨가 찍은
사진에서도 이 위령비가 서 있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47년 조선산악회가 세웠다는 푯말이 이때 존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푯말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이 독도에 상륙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쟁 중임에도 한국 사회는 크게 들끓었다.
계획을 세우고 화강석으로 된 표석을 준비해 울릉도까지 갔다.
그런데 마침 독도 인근에서 미군기들이 폭격 연습을 하고 있어 독도 상륙을
포기하고 울릉경찰서에 표석을 맡겨놓고 돌아왔다(실패한 2차 조사).
그리고 1년 2개월 뒤인 53년 10월11일, 부산에서 해군의 905정(정장 서덕균 대위)을
타고 출항해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상륙하였다(3차 조사). 10월13일 이 조사대는
독도에 접안하는 데 성공했으나 악천후 때문에 바로 철수했다
(그리고 15일 다시 도전해 상륙에 성공한 것이다).
조사대가 접안만 하고 돌아선 13일, 905정 근처로
레이더 장비까지 갖춘‘나가라(250t)’라는 이름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나타났다.
이에 905정장 서 대위가 ‘총원 전투 배치’ 명령을 내리고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나가라는 뱃머리를 돌려 동남쪽으로 빠져나갔다.
해상회담을 하기 위해 일본 중의원이 타고 있었다.
뱃머리를 돌렸다”고 보도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세 시간 후 이 방송이
“한국 군함이 평화선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에 우리는 평화선을 인정치 않는다며
한국 측 요구를 거부했다”고 전혀 다른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텐트를 친 후 야영에 들어갔는데 이
물오리 한 마리가 제 발로 야영지로 들어와생경한 풍경 속에 젖어 있던 조사대를 기쁘게 했다.
조사대 인원 중 유일의 언론인이었던 홍 회장은 “15일 우리 라디오 방송은
부산에서 10여만명의 어민이 모여
해양주권선(평화선)을 지키자는 대회를 연 것을생중계했는데, 이 방송을 잡은 905정은 무전기를 통해 독도에 있는 우리에게
다시 생중계 해주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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