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속의 연암 박지원
민중의 우상 광문이
지원은 열여섯(1751)살에 결혼하였다.
3년 내리 흉년이 들어 궁핍생활이 이어지는 사회였지만,
지원은 유안재 이보천(1714-1777)의 집안에 장가를 들어 오히려 형편이
호전된 셈이었다. 그의 장인 이보천은 근엄하고 청렴 고결하여 예법으로써
스스로를 단속하는 성미였고, 그 아우 이양천(1716~1755)은 경서와 사서를
아주 좋아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덕분에 지원은 장인 이보천에게서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 이양천에
게서는 사기》를 배웠다. 사마천의 글을 배움으로써 문장 짓는 법을 터득
하였던 건데, 하루는 <항우본기>를 모방하여 <이충무공전>을 지었다.
글을 본 스승 이양천이 깜짝 놀라며 칭찬하였다.
“자네에게는 반고와 사마천 같은 글 솜씨가 있는 게야.”
이양천은 지원을 특별히 애지중지하여 가르치고 꾸짖어주었으며
절실한 말로 바로잡아 옛사람이 이룬 바와 같은 성취를 기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원이 언젠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서까래만한
크기의 붓 다섯 개를 얻었다. 그런데 붓대에는
“붓으로 오악을 누르리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중국에도 오악이 있으나
여기서는 우리나라의 오악이다. 곧 동쪽의 금강산, 서쪽의 묘향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을 가리킨다.
‘오악을 누르리라’는 일국에 필명을 떨칠 것이라는 뜻이겠다.
아무튼 지원이 결혼한 이 해 8월3일자 기사는 철종시대에 창궐하였던 도적의
무리인 명화적의 난동에 빨리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포군수를 파직시켰다고
기록하였다. 즉 백성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도 긴밀한 상황대처를 하지 못했
다는 책임을 수령에게 물은 것이다. 아래에 《실록》의 부분을 적는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포군의 명화적 수백 명이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고서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곳곳에서 도둑질을 하여 다친 사람이 많은데, 본군에서 감영에
보고한 것이 지극히 더디었으니, 군수 윤득중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하략)
1754년 3월22일, 영조는 청계천 인근에 거주하는 평민들에게 ‘청계천 준설공사’에
대한 의견을 구하였다. 수백 명을 창경궁 홍화문 앞 광장에 불러 모아 공사에 찬성하는
사람은 앉게 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일어서게 했다. 이때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앉아 있었고, 반대한다고 일어난 자가 없는지라 드디어 공사를 지시하였다.’
영조의 민생안정 정책 가운데 최고의 치세로 평가되는 청계천 준설공사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먼저 물을 맑게 하여 도심을 정화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 모든 분야가 깨끗한
물처럼 흐르기를 원했다. 그 때에 청계천 준설공사로 약 8만 냥의 공사비가 인부들에게
지급되었는데, 이때 청계천 주변에서 떠돌던 부랑자들이 대거 인부로 공사에 투입되었다.
물론 기득권층의 반대는 아주 심했고, 호조에서도 막대한 경비가 남발되어 돈 가치가 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매년 청계천 준설공사를 반대했다. 하지만 일반 굶주린 백성에게는
오히려 고마운 정책이었다. 이 해 11월23일
《실록》에 강력한 단속사항이 실렸는데, 다음과 같다.
임금이 포도대장 구선행과 이의용을 불러 하명하였다. “도성 안에 거지들이
너무 많고 이들이 사람들에게 재물을 억지로 강요하니 그들의 과격함을 막아야 한다.”
《실록》 12월26일 기사는 이러하다.
도성 안에 거지들이 가득하고 굶어죽은 시체들이 성문 밖에 백여 구가 쌓였다.”
사회문제가 된 무뢰배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순박한 거지들은 그저
청계천 위아래를 오르내리며 무리 지어 동냥을 일삼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 거지들의
지도자 노릇을 한 인물이 바로 ‘광문’이었는데, 지원은 이런 특이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광문자전>이라는 소설에 담아내고자 마음먹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거지는 광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천한 거지가 《실록》에 기록될 정도니 그의 유명세가 오죽 했겠는가. 이렇듯 박지원이
살던 조선사회는 걸인들의 유랑이 사회적 불안요소이기는 했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 해학이 어우러진 새로운 문화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박지원의 조부 박필균이 호조 · 병조참판을 역임한 뒤 1754년 대사간으로 재직할 때였다.
그는 사도세자의 서연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진계하는 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 그때 지원은 청렴한 할아버지의 이력에 누를
끼칠까봐 여러 편의 풍자 글을 익명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집안의 늙은 하인에게서 듣게 된 ‘광문’의 이야기를 자칫 놓칠세라 밤새
글로 옮겼는데, 광문은 당시 아주 유명했던 거지의 이름으로, 1742년, 그러니까 영조18년에
나온 《파수록》 등의 야담집에도 당대의 거지 왕초 광문의 행적이 기록돼 있을 정도였다.
사실 지원이 광문이란 거지를 소설 소재로 삼게 된 동기는 당시 한양 주변을 배회하던 거지
들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사회불안과 사회변화를 동시에 일으킨 데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러한 시점의 조선사회에서 그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었는데, 그는 너무
슬펐고 우울하였지만, 다행히 글재주가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하는 말이 있듯이,
그는 즐기고 싶었다. <민옹전>에 나오는 민유신을 만난 것도 이 무렵으로써, 그는
이런저런 풍자 글로써 자신의 병마와 놀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첫 소설 「광문자전」을 쓴지 10년 후인 1764년, 박지원은 <광문자전후기>를 썼는데,
바로 그해, 즉 1764년 4월17일의 《실록》에 광문은 ‘달문’으로 올라있다.
이달손(달문의 아들)은 본명이 이태정인데,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혼란스럽게 했으니 그를 변방으로 유배 보낸다. 달문이란 자는 원래 한양의 무뢰배
로서 세상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처럼 머리를 풀고
다니며 인심을 현혹하고 풍속을 어지럽혔다.
이어서 영조는 나이가 많으면서도 머리를 땋는 자들을 엄히 단속해서 무겁게 처벌하라고
지시하였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머리를 땋는 자에는 광문이도 해당된다. 《실록》을 보면 달문
의 아들 달손이란 자가 경상도에서 중과 노비, 점쟁이들을 불러 모아 역모를 꾀하다 그를
따르던 자근만이란 자의 밀고로 결국 체포되었다. 그래서 달문은 경성에 유배를 갔다가 방면
되었으며, 사헌부에서는 그의 죄가 무거우니 참형에 처할 것을 거듭 간청했지만 임금은 당시
민중들의 우상이었던 달문(광문)을 끝내 죽이지 않았다. 그래서 박지원은 광문이 한양에
다시 나타나자 그를 보기 위해 도성이 한 동안 텅 비었다고 표현한다.
박지원은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지만 시대의 아픔을 풍자적인 글로 표현했다.
암담한 정치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는 무기로는 문학만한 게 없었고, 그의 풍자적인 글쓰기는
낡은 봉건적 관념, 그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일깨우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주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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