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불교의 확산
저자거리로, 서민 속으로 ‘민중불교’ 확산
임진왜란·병자호란 두 전쟁 뒤 유리걸식하는 집단이 생활터전을 버리고
도시고 산골이고 들판이고 바닷가고 가릴 것 없이 몰려다녔다.
이들은 먹거리가 없어서 유리걸식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과중한 부역과
조세에 시달리다 못해 살던 고장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당패(社堂牌 또는 舍堂牌)들이 유리민을 끌어 모았다.
사당패는 깃대를 높이 세우고 북을 울리고 다니며 유리민을 모아 길과
산골짜기를 메웠다.
그러나 사당패 집단이 워낙 크다보니 관가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본디 사당패는 조선 초기 원각사를 지을 때부터 형성되었다.
불교에서는 남자 신도를 거사, 여자 신도를 사당이라 부른다.
원각사를 지을 때 거사와 사당이 자금을 모으려 돌아다니며 그 보시의 정도에 따라
노비는 양인으로 만들어주고 양인은 부역을 면제해 준다면서 재물을 받았다.
이들의 우두머리를 사장(社長)이라 하고 남자를 남사당, 여자를 여사당이라 하였다.
남사당을 거사, 여사당을 회사(回寺, 절돌림)라고도 하였다.
원각사가 완성된 뒤에도 사당패는 전국을 돌며 절에 필요한 재물을 염출하였는데
낮은 구실아치와 천민들까지 합세해 패를 이루었다.
사당패와 불교의 결탁 이 무리는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면서
생업을 폐하고 부역을 기피하였다.
예종실록〉에는 “지방에서는 천 명, 만 명이 무리를 지어 절에 올라가 향을 사르고
서울에서는 밤낮으로 남녀가 여염집에 섞여 살면서 북을 울리며 돌아다닌다”고 썼다.
그 동안 나라에서 여러 번 금령을 내려 잡아들이기도 하였으나 사라지지 않다가
임진왜란 직후 혼란을 틈타 더욱 극성을 부렸다.
이 무렵부터는 단순히 재물을 모아 착복하거나 절을 돕는 일보다는
광대놀이를 벌이고 매음행위를 하였다. 매음행위는 처음 승려를
대상으로 하다가 차츰 일반인을 상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1607년 사헌부에서 사당패 대책에 대한 건의를 올렸다.
“난리가 난 뒤로 군사제도를 고치는 일이 많아 문교를 일으킬 겨를이 없었습니다.
원로는 이미 죽었으나 후생이 일어나지 못해 식자들이 한심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더욱이 10여년간 인심이 흔들리고 사설이 횡행하는데도 금지와 단속이 없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해서 사내는 거사가 되고 계집은 사당이 되어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승복을 입고 밥을 빌어먹으며 서로 끌어들입니다”〈선조실록〉
이어 그대로 두면 백련교도와 같은 변란이 있을지 모르니 이들을 색출해 가족관계를
알 수 있는 계집은 북쪽으로 옮겨 살게 하고 의탁할 곳 없는 어린이는 관아의 노비로
삼을 것이며 요언으로 사람을 현혹시키고 선동하는 자는 잡아 초달을 안기라고 요구하였다.
다시 금령이 발동되고 사당패를 수색하느라 전국이 들썩였으나 여전히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당패는 전국에 걸쳐 활동하였는데 경기 일대의 중심지는 안성의 청룡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룡사의 사하촌에는 지금도 이들 전설이 전해진다.
이들 사당패는 조선 불교의 특이한 유파였으며 조선 후기 강력한 사회세력이 되었다.
이런 시대 환경에서 산 괴승을 한 분 소개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악산 대원사에 가보면 그 건물 주렴에 이런 게송이 걸려 있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으며
天衾地席山爲枕
/ 달은 촛불, 구름은 병풍, 바다를 술동이로 만들어
月燭雲屛海作樽
/ 대취해 옷깃을 떨쳐 일어나 춤을 추니
大醉居然仍起舞
/ 긴 소매자락 곤륜산에 걸리지나 않을지
却嫌長袖掛崑崙.
이 게송을 지은이는 진묵(震默, 1562-1633) 스님이다.
진묵은 크게 침묵한다는 뜻이다.
그는 만경현의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출가한 뒤에 전주의 봉서사, 모악산의
대원암, 부안의 월명암, 완주의 송광사 등의 절에서 수도하였다.
그가 봉서사에 있을 때 어머니를 그 아래 왜막촌에 모시고 봉양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홀어머니가 몹시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은 “표주박 들고 노상에서 걸식한다”고 표현하였다.
진묵스님, 왕실불교 거부 그에게는 많은 민중설화가 따라다녔다.
어머니가 모기에 시달리자 산신령을 시켜 모기를 쫓았든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
무덤에 벌초하고 제사를 드리면 농사가 잘 되어 주민들이 수백년 동안 이 일을 하였다든지,
신중들로부터 부처로 떠받들어졌다든지, 나한의 머리를 때리며
부렸다든지, 곡차라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는데 어느 승려가 술을 권하면서
술이라 대답하자 금강력사가 그 승려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가 월명암에 거주할 적에 나한이 등불을 월명암에 비추었다든지, 끓인 생선을 먹고
냇가에서 대변을 보자 무수한 고기가 펄덕거리며 헤엄쳐 갔다든지,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자
물을 뿜어 껐다든지, 전주 송광사와 부여 무량사에서 부처님을 조성하고 동시에
증명을 부탁하자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염주를 보내 증명케 하였다든지 하는
신이설(神異說)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떠돌아 다녔다.
그를 두고 “스승의 가르침에 말미암지 않았다”(不由師敎)라 하였으니 그야말로 국외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물 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두고 석가불의 진영자(眞影子)라고 하였다 하니
천의무봉의 선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진 병자 두 난리를 겪으면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여 생불로 추앙되었던 것이요
또 승직 따위를 받지 않고 만행으로 일생을 살면서 저술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민중의 구비(口碑)로 설화가 전해졌고 그가 열반한 지 224년 뒤 초의선사가
이 설화를 자신의 문집에 싣고 그 경위를 설명하였으며 여항문학의 리더였던 조수삼이 그의
행적을 적어 기렸다.
따라서 진묵스님은 총림불교를 거부한 ‘땡초’였던 셈이다.
그는 유명 사찰에서 머문 적이 없었고 이른바 고승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불교계의 주류에서는 그를 완전히 도외시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나 명리를
초월한 그를 민중들은 신불로 받들었다.
그는 조선 후기 민중불교의 한 상징적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스님들이 17~8세기 민중을 충동하고 변혁운동을 조종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17세기 후반기에 다시 불교는 된서리를 맞았다.
곧 효종 현종 시기 고집스런 사림출신의 주자학도들이 정권을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이단을
배척하는 것이 자신들의 시대적 소명이라 여겼다.
완고한 이들은 불교계의 경제적 수탈로 국가 재정을 보전하고 제한적이나마 사회
신분을 인정하려는 정책마저 거부하였다.
현종은 이들의 건의에 따라 양민이 스님이 되는 길을 엄격하게 통제하였으며 이를 어긴 자를
낱낱이 찾아내 환속시키고 엄하게 죄를 물었다.
하지만 서울 주변에 있는 절, 특히 봉선사와 봉원사에는 스님들이 많았다.
조정에서 헐어내자는 논의가 일어났으나 일단 이 의견을 접어두고 북악산 아래 성 안에
있는 자수원과 인수원을 헐어냈다.
두 절은 인조 때부터 늙어서 의탁할 데가 없는 궁녀들이 들어가 비구니들과 함께
부처님을 섬기며 노년을 보내는 곳이다. 말하자면 정업원의 후신이었다.
이 두 절에서는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는데 이때 위패를 거두어 땅에 묻었다.
비구니 가운데 젊은 여자는 속세로 돌려보내고 늙은이는 도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궁중불교의 뿌리를 뽑으려는 조치였다.
송준길은 임금에게 두 절을 헐어버린 일을 축하면서 한 술 더 떠 “주자는 절을 헐어 서당을
지었다”고 강조하여 자수원터는 본디 북학이 있던 자리이니 그 기와와 목재로
북학 건물을 짓자고 건의해 관철시켰다.
또한 두 절의 목재와 기와를 가져다가 성균관 안에 비천당(丕闡堂) 일량재(一兩齋)
벽팔재(闢八齋)를 짓게 하였다.
1662년 5월 전라감사 이태연이 “도내 여러 절의 불상에 땀이 흐르니 이상스런
변괴입니다”라는 특별한 보고를 올렸다.
여름철에 완주의 송광사와 남원의 실상사 부처상에 물이 흐르는 일을 두고 한 말이다.
현종은 이 보고에 현혹되었고 어떤 벼슬아치는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라고 근심하였다.
이에 민정중이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노역통해 사찰 유지 “중들이 불상을 조성할 때 으레 나무로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금을
덧씌우기 때문에 장마철만 되면 습기가 엉키고 맺혀서 물방울이 가득 떨어집니다.
겨울철에 춥지 않아 여름에 밴 습기가 완전히 걷히지 않으면 안개와 이슬이 증기로 맺힙니다.
이는 깊은 산에 사는 늙은 중이 늘 말하는 바입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땀이 난다고 하여 세상의 이목을 어지럽히고 인심을 요동시키니 청컨대
이태연을 엄중히 심문하고 땀이 난다는 불상을 찾아내 모조리 부숴버릴 것이며 말을 퍼뜨린
중들은 국법에 따라 처벌하여 이단의 무리를 길이 막으소서”〈노봉집(老峰集)〉
민정중의 말이 과학적으로 옳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즈음 현종은 갑자기 두 딸을 잃었다. 장녀 명선공주와 차녀 명혜공주가 시집갈
나이에 연달아 죽은 것이다.
임금과 왕비는 애통해 마지않으며 벼슬아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공주의 무덤 옆에
왕실의 원찰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이 절이 광주 성부산 아래에 세운 봉국사이다.
이 무렵까지도 궁중에서 수륙재를 베풀 때 스님을 초청하는 등 불교 행사를 치렀으나
선비들이 막아낼 수 없었다.
현종도 심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재산이 없는 하급 사찰에서는 이런 악조건에서 자생력을 키우는 길을 모색하였다.
향승청(鄕僧廳)을 조직하여 토지나 돈이나 곡식을 보시하거나 장을 만드는 콩이나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등을 공급하여 사찰을 중창하거나 수리하거나 생활비로 충당하였던 것이다.
때로는 직접 노역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승계는 서원의 학계(學契)처럼 경제적 도움을 주는 조직이었으나 신도의 유대조직
으로도 활용되었다. 승계는 조선 후기불교 탄압이 가중되는 조건에서 사찰 경제에
큰 보탬을 주었으며 또 변혁세력과 연계되는 조직으로도 활용되었다.
출처 : 불교신문
'불교문화·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인의 예언과 마야부인의 죽음 (0) | 2018.01.15 |
---|---|
부처님 탄생 (0) | 2018.01.15 |
성철 스님의 마지막 열반송 및 유언 (0) | 2018.01.15 |
왜 원효인가 (0) | 2018.01.15 |
아도화상의 전법 (선산·도리사 전설) (0) | 2018.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