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상식

우리나라 사찰은 왜 산 속에 많게 되었나요?

선바우1 2018. 1. 14. 15:50






우리나라 사찰은 왜 산 속에 많게 되었나요?



불교국교로 삼았던 삼국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평지에도 산지 못지 않게 절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산에 있는 절은 그 규모에 있어서 평지에 있는 절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나라의 큰 사찰은 거의 산 속에 있고,

절이라고 하면 으레 산 속에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산에 절이 있기는 하지만 큰절은 도시 근교 평지에 있습니다.
왜 우리 나라만 이렇게 산지가람이 많아지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 첫째는 우리민족의 뿌리 깊은 산악신앙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산 또한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산의 정기로 마을을 이루고 그것에 의해 큰 인물이 태어나고,
묻히고 또한 우리 조상은 기쁘고 궂은 일이 있을 때 큰 산 바위의 산신을 찾아 기도하고

산신의 뜻에 운명을 맡기는 산악신앙이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에

불교의 참된 빛 또한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옛부터 고승들은 산봉우리마다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이나 불교의 지고한

사상을 응축시킨 용어들로 봉우리 이름을 지어 붙였으며,

그 산 속 모든 곳에 부처님이 머물러 있고 부처님이 숨쉬고 계신 도량이라고

설파함으로 우리 고유의 산악신앙을 무리 없이 흡수하였습니다.

전국의 이름 있고 성스러운 산, 특히 경주 남산,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묘향산. 칠보산 등의 산봉우리마다 불 보살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곳의 많은 사찰들은 고유의 산악신앙을 기초로 하여 그 산들이
불 보살님이 머물러 있는 불교의 성지聖地로 변화 발전시킴에 따라

자연스럽게 창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둘째로는 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 때문입니다.

왜구들의 침략과 관련하여 창건된 금정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 등의 사찰들,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등에 신라의 사찰을 건립한 것은 나라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화된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셋째는 불교의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 경향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삭발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가정을 떠나 수행해야 하는 삭발 염의

독신 수행 생활이라는 세간을 떠나는 출가 수행의 형태와 세속의 명리나 행복보다는

탈속(脫俗)과 해탈을 추구하는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불교의 구도(求道)형태나

가르침으로 인해 수행인들의 수도처로는, 그 어느 곳보다 한적한 산중이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넷째는 신라 말의 道詵國師의 풍수지리학에 입각한

산천비보설(山川裨補說)의 영향 때문입니다.

산천비보란 나라 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선국사의 설에 의하면, 지형이나 지세(地勢)는 국가나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땅에도 쇠약함과 왕성함, 순조로움과 어긋남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도선국사는 인체에 쑥을 놓아 뜸(灸)을 뜨듯이 절과 탑을

쑥으로 삼아 쇠약하거나 어긋남이 있는 곳에 뜸질을 하면 삼재(三災)가

사라지고 나라가 튼튼해진다고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을

세울 곳을 선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산천비보설은 왕건(王建)에 의해서 깊이 신봉되어 고려시대

5백 년 동안 도선이 지정한 산에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입니다.


● 다섯째는 조선 5백년간의 억불정책 때문입니다.

사찰이라고 하면 산사(山寺)를 연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 때문이었습니다.

1392년의 조선 開國에서부터 대한(大韓)으로 국호를 고친 1897년까지의

불교는 한마디로 배척과 억압을 당한 수난의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불교가 산 속으로 숨어야 했던가? 많은 억압책 가운데

몇 가지 예만 들 어보기로 할까요?

태종 6년(1406)에는 전국에 있는 절 가운데 242개만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를 폐사(廢寺)로 만들어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였습니다.

세종 6년(1424)에는 36개의 사찰만을 남겨 두었으며,

승려들의 도성(都城) 출입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종은 도성 안의 염불소(念佛所)와 비구니 사찰 23개를 모두

헐어버리고 전국 승려의 환속을 꾀하였으며, 연산군은 승려의 무조건

적인 환속과 더불어 그들을 노비로 삼아 사냥을 할 때 데리고 가서 살생의

동조자인 몰이꾼으로 이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국가 차원의 억압은 개화기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에 동반한

유생들의 횡포 속에서 승려들은 맞아 죽어도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으며,
마을 가까이에 있는 사찰은 유생들이 주연(酒宴)을 베푸는 장소

이용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왕릉을 돌아보거나 왕족의 원찰(願刹)이 되었던 몇몇 사찰을 제외

하고는 모두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깊은 산 속에서 승려들은 피나는 정진과 왕실의 상궁이나 아녀자들의

기복불교로 불도(佛道)와 절의 살림은 명맥을 이어왔고,

그것이 5백 년의 세월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오늘까지 사찰은 으레 산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숭유억불 정책은 고려말 불교의 타락으로 인한 과보라 할 수 있으나,

불교인은 이를 슬기롭게 전화위복으로 삼아 지금과 같이 우리나라

명산에 절이 자리하게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기층민의 기복불교와 각종 민간신앙을 불교화 시키고,
바위굴을 염불당 삼아 정진한 스님들의 노력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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