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명곡

동무생각 (사우 思友)

선바우1 2018. 2. 13. 16:17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바이올린연주곡


테너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1922년 작. 제목은 ‘사우(思友)’였으나 뒤에 제목을 쉽게 풀어쓰게 되어

‘동무생각’으로 바뀌었다. 원래 동요조의 선율이 바탕을 이룬, 작곡자의

가곡으로서는 퍽 고조된 작품으로, 악보에 정리된 곡을 작사자에게

부탁해서 가사를 붙였다.

이 노래는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전반부의 전형적인 동요풍에서 후반부의 변박자에 이르러서

감정을 격화시킨 것이 퍽 효과적이다.


 

박태준 (朴泰俊 1900~1986)


작곡가·합창지휘자. 대구 출생. 대구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 동요의 초창기 작품인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시인 이은상과 함께

《동무생각》 등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32년 이후 미국의 터스컬럼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휘를

배우고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설치하고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다. 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였다.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이고, 문화훈장·서울시 문화상·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

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동산엔 미국에서 온 세 선교사의 사택이 자리하고 있고, 또 그들이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사과나무의 자손목이 남아 있지만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분의 선교사들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은
모두 2층 양옥으로 지금은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네언덕을 지칭한 망이다. 한 가지 더 기가 막히는 표현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기 때문에

가사에 등장하는 백합화는 바로 그 여학생을 두고 한말이다.

그러면서도 ‘짝사랑’이니, ‘연인생각’이니 하는 통속적인 말을 삼가고 그저 ‘동무생각’

(처음엔 사우(思友)’라 고함)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청라언덕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계산성당에서 길을 건너 대구 제일교회가 바라 보이는
정면에서 왼편으로 난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