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반 고흐,
최북(1720 ~ 1786? )의 작품세계
최북본관은 무주(茂朱).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
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이다. 그는 떠돌이 개처럼 살다가 49세의 나이로 눈오는 날 거리에서 동사(凍死)했다고만 전해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볼 때 대략 1720년(숙종 46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1747년(영조 23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에 관해서 남공철의 <금릉집>과 조희룡의 <호산외사> 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투신하였던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하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양이나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서상기(西廂記)」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김홍도(金弘道)·이인문(李寅文)·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호산외사』에 의하면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중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별칭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기 이름인 '북(北)'자를 둘 쪼개서(七七) 스스로를 '칠칠이'라고 했다. 호생관(毫生館)도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지었다. 또한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로도 불렸다. 그는 늘 5~6되씩 술을 마셨다. 집안의 책과 종이 천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털어서 술과 바꾸었다. 그림 한 폭을 팔면 열흘 동안 오로지 술병을 끼고 살았다. 박제가는 최북의 무모한 음주벽을 무자식에서 찾았다. 자식이 없어서 삶을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술을 탐닉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그의 서울 생활을 묘사한 한 시에는 그림을 그려서 근근이 먹고사는 그의 초상이 선명하다. "한양에서 그림 파는 최북/오막살이 신세에 네 벽 모두 텅 비었네./유리안경과 나무필통 옆에 두고/하루종일 문 닫고 산수화 그려/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끼니 때우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끼니 때우네."(신광수) 애꾸눈에 키가 몹시 작고 몸집이 왜소했던 최북은 성격이 까칠한 편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살았지만 취기가 오르면 안하무인격으로 욕지기를 해대고 술주정을 부렸다. 감정이 격하고 성질이 괴팍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술로 벼리어진 자존심과 넘치는 풍류의식으로, 평생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화조·초충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산수화이다. 그의 괴팍한 기질대로 대체로 치기(稚氣)가 있는 듯하면서 소박하고 시정(詩情) 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들은 크게 진경산수화와 남종화 계통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진경산수화에서는 「표훈사도(表訓寺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겸재 정선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진경산수에 대하여 최북은 “무릇 사람의 풍속도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바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한강조어도(漢江釣魚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추경산수도 (秋景山水圖)」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남종화 계열의 작품에서는 심사정(沈師正) 등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엿보이기도 한다. 최북은 18세기의 '얼리 어답터'(새 문명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였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붉은 무와 가지, 배추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청나라 화단의 유행을 소화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도 앞장서서 실험했다.이러한 화풍을 계승, 변천시키면서 개인 소장의 「조어도(釣魚圖)」와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의 조형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등이 있다. 최북은 각별한 사이였던 벗 이현환(李玄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