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오드리 헵번 이야기

선바우1 2018. 2. 26. 21:41


오드리 헵번 이야기

The Audrey Hepburn Story. 2000



감독

스티븐 롭맨 Steven Robman


출연

제니퍼 러브 휴잇(오드리 헵번 역), 프란시스 피셔(엘라 반 힘스트라 역),

케어 둘리(조셉 헵번 역), 가브리엘 막트(윌리엄 홀든 역), 피터 자일스(제임스 헨슨 역),

에미 로섬(어린 오드리 헵번 역), 에릭 맥코맥(멜 페러 역)




어릴 때, 오드리는 사이가 나쁜 부모님이 말다툼하는 내내 테이블 밑에 숨어 있었다.

10대가 되고 영국 켄트의 여학교에서 발레를 배운다. 전쟁 중 네덜란드 아른햄에서 살다가

식량 조달도 어려운 상황에서 전쟁이 끝나지만 오드리는 병으로 누워 버린다.


건강을 회복한 오드리는 다시 영국으로 이사해 발레에 전념하기 시작하는데,

무대 오디션에서 제롬 로빈스가 첫눈에 반하며, 단역을 얻는다. 그리고 서서히 무대에서

경력을 쌓아 간다. 오드리는 어느 날 "지지"를 준비 중이던 콜레트의 마음에 들어 처음

으로 주역의 자리를 얻는다. 그 무대 연습은 오드리에게 고난의 연속으로 즐거운 것일

수만은 없었지만 뭔가를 이루어낸다. 그 무대의 평판을 듣고 그녀의 스크린 테스트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윌리엄 와일러였다. 그리고 오드리는 "로마의 휴일"

주연 자리를 차지하고 세계적 인기 여배우로 성장해 오드리의 시대가 열리는데....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54~1993120)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영국의 배우이자 인도주의자이다. 정식 풀네임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

세간에선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아버지인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이 훗날 성에 헵번(Hepburn)을 붙이면서 본인도 'Audrey Hepburn-Ruston'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헵번은 로마의 휴일(1953),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을 통해 유명해졌으며

특히 로마의 휴일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골든 글로브상,

에미상, 그래미상을 수상하였으며 말년에는 UNICEF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헵번은 1993120일 대장암으로 타계했으며, 6년 후인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선정한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 배우 목록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다.


생애


벨기에 태생.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여남작 (Baroness Ella van Heemstra) 사이에서 태어나

벨기에와 영국, 네덜란드를 옮겨가며 지냈다. 아버지는 오드리를 낳은 후 가정을 버리고 방랑,

헵번이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에 아일랜드에 있는 요양원에서 다시 만난 게 전부라고 한다.

당시 나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매우 험악했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도 아버지를

만나는 것을 심히 고민했었다.


10대 시절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보냈는데 그때 살던 곳이 바로 마켓 가든 작전으로

악명 높은 아른헴. 실제 자원하여 부상병 치료에 나섰다 전투에 휘말린 적도 있다고.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만큼은 출연을 사양했다고 한다. 헐리웃판 전쟁과 평화에

출연하긴 하지만 전투장면에서는 출연하지 않는다. 여담으로 당시 16세의 간호사였던 헵번이

치료한 어느 영국군 부상병과 20여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부상병은 007 시리즈의 감독 테렌스 영.원래 건강한 몸도 아니었던 데다 어린 시절에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피난민 생활을 했는데 먹을 게 너무 없어서 튤립의 구근까지

캐먹어야 했다고 한다. 온갖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영양실조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종전 후 영국에 돌아왔을 무렵 전쟁난민 지원모금을 위한 홍보 포스터의 모델이

될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로우틴 때까지만 해도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키가 너무 커져(170cm) 포기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영향이 컸나보다 어려운 집안 사정 속에 연기 활동으로 집안에 보탬을 주다 1950년대

들어와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긴 해도 전체적인 지명도로 치면 무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1952,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 초연에

캐스팅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24세 때인 1953년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끈다.

로마의 휴일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남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는

이야기 구성의 원조로, 이것 외에도 훗날에 만들어진 여러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로마의 휴일은 프랑크 카프라 감독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갔고,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다.

와일러는 앤 공주를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쥴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연극배우로 어느 정도 인지도는 있지만 영화계에서는 완전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된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면서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포스터에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하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54년 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인 사브리나 페어차일드(Sabrina Fairchild)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여간다.

사브리나 출연 직후 헵번은 영화사 쪽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가 아니라 브로드웨이 연극인

<온디네(Ondine)>에 출연,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단순히 예쁜 외모로만 뜬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에서 주인공을 맡은 그녀는 다시 한 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특히 이른 아침에 검정색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 홀리 고라이틀리(Holly Golightly)가 택시에서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의 쇼윈도우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모습은 레전드급의 명장면으로 그녀에게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다.

물론 영화 내에서 상류층의 남자들을 만나며 신분상승을 꿈꾸는 여성 홀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건 덤.

다만 헵번은 홀리의 성격이나 생활이 자신의 실제 성격과 너무 달라서 이 영화를 찍기 싫어했다고 한다.

참고로 오드리 헵번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들 중에서 자신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뽑은 영화는

화니 페이스라고 한다.


노래실력도 괜찮아서 뮤지컬 영화 화니 페이스 와 <마이 페어 레이디>에 출연하기도 했고 위에서 설명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훗날 명곡의 반열에 든 "문 리버"를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부르기도 했다.

동화 오디오북도 녹음해서 그래미는 이 오디오북으로 받았다.

,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의 노래 장면은 다른 가수의 더빙이었다.

본래 영화판 마이 페어 레이디는 뮤지컬 초연 배우들을 그대로 기용하여 제작할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초연 당시 여주인공을 맡았던 줄리 앤드루스의 낮은 인지도를 못마땅해 하면서 갑작스럽게 오드리 헵번으로

여주인공역을 바꾼다. 하지만 헵번은 크랭크 인이 될 때까지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만한 충분한

시간을 얻지 못했고 감독 또한 오드리 헵번의 노래실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과 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에서 노래 더빙을 한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영화에 수록하게 된 것.

더군다나 오드리 헵번은 줄리 엔드류스가 마이 페어 레이디의 출연이 불발 돠고 출연한

메리 포핀스에 밀려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놓치는 바람에 헵번은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5920일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이처럼 오드리 헵번이 영화상에서 맡은 배역 자체는 다양했지만 데뷔작인 <로마의 휴일>부터 대부분의 영화상에서

헵번이 맡은 캐릭터의 성격은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의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력이 모자랐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사나 대중들이 오드리 헵번에게 바랐던 게 저런 이미지였기

때문. 오드리 헵번은 이에 불만이 많았는지 연기생활 후반기에 찍은 샤레이드(1963)에서는 남편의 죽음 뒤 음모에

시달리는 귀족 미망인 역을, 어두워질 때까지(1967)에서는 살해 위협에 처한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여 기존

이미지와는 다른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다.

<어두워질 때까지> 이후로는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 작 '영혼은 그대 곁에(원제: Always)'

마지막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맏은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스필버그에게 "누가 천사를 연기할 거지?"라고

물었는데 스필버그가 "오드리 헵번"이라고 대답하자, 드레이퍼스는 "그래, 그녀말고 누가 천사를 맡을 수 있을까!"라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고... 헵번은 아카데미, 에미상, 그래미상, 토니상을 수상했던 몇 사람 중 한명으로 남았다.


사생활


첫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이라는 연인이 있었으나 헵번이 유명해지면서 스케쥴이 바빠지자 헤어진다.

이후 미국 배우인 유부남 멜 퍼러(Mel Ferrer)와 사귀게 되는데, 멜 퍼러는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헵번도 인정할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지만, 헵번을 구워삶았다. 결국 1954년 멜퍼러는 세 번재 와이프를 버리고

오드리 헵번과 네 번째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은 아무리 봐도 헵번이 아깝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탑 여배우가 한물간 이혼남 배우랑 결혼하는 셈이었으니.

헵번은 아이를 좋아하여 많이 가지려고 했는데, 첫 번째 임신 때 사고([언포기븐]촬영 당시 낙마사고를

당했다고 한다)유산한 이후 잦은 유산을 했고, 퍼러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아들 하나로 끝난다.

이 결혼은 불행하게 끝장났는데, 멜 퍼러는 오드리 헵번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의 바람기 때문에

헵번과 잦은 다툼을 했고 결국 참다못한 헵번은 1968년 이혼한다.

이후로 헵번은 멜 퍼러를 피했으며,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멜퍼러는 장수하다가 200990살로 사망했다.


두 번째 결혼은 이탈리아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Andrea Dotti)1969년 하는데, 재혼 시 나이가

39세였는데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후로도 임신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남자복은 지지리도 없는지 안드레아 도티도 바람둥이였고 오드리는 이번에도 참고 살다가

결혼 후 13년 만에 이혼했다. 그래도 도티와는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고..


DDP에서 이루어진 전시회 내용에 따르면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 한 아이가 "나는 오드리 햅번과

결혼식을 올릴꺼에요" 라고 말한 꼬마가 바로 안드레아 도티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운명은 정말 모르는 법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후 사망 시까지 네덜란드 배우인 로버트 월더와 동거했으나 결혼을 하진 않았다.

동거 시작했을 때 나이가 50대였으니 물론 아이는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평소에는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며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사치도 하지 않았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 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으며

예쁜 재규어 승용차도 가지고 싶어 하면서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 보러 갈 때 쓰지도 못한다고 끝내 안 샀다.

둘째 아들의 회고에 따르면 하도 사람들이 "너희 엄마가 밥은 주냐, 책은 읽어 주냐"고 물어봐서

다른 엄마들은 아무도 집에서 밥을 안 해 줘서 자기에게 묻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은퇴 이후의 행보


아름답게 늙는다는 말의 좋은 사례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 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 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하고 또한 아름답다.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이런 모습을 보인 분이라 헵번의 아버지가 나치 동조자였다고 비난한 소수의 사람들은

십자포화를 TOT로 맞게 된다. 어차피 아버지는 헵번이 어릴 때 집을 나갔으니 영향을 받을 겨를도 없었으며.

오드리 헵번은 사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 네덜란드로 갔던 어렸을 적

독일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식량을 죄다 수탈해가는 바람에 튤립 구근을 캐먹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연합군과 유니세프가 지원해 준 연유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처절한 경험은 그녀가 인도주의적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

더치 인 세븐 레슨(1948)

몬테 칼로 베이비(1952)

천국에서의 웃음(1951)

원 와일드 오앗(1951)

라벤더 힐 몹(1951)

영 와이브스 테일(1951)

비밀스런 사람들(1952)

로마의 휴일(1953)

사브리나(1954)

전쟁과 평화(1956)

화니 페이스(1957)

하오의 연정(1957)

그린 맨션(1959)

파계(1959)

용서받지 못한 자(1960)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칠드렌스 아워(1961)

샤레이드(1963)

파리 웬 잇 시즐(1964)

마이 페어 레이디(1964)

백만 달러의 사랑(1966)

투 포더 워드(1967)

밤이 될때까지 기다려라(1967)

로빈과 마리안(1976)

블러드라인(1979)

그들다 웃는다(1981)

영혼은 그대 곁에(1989)

세계의 정원(1990)

수상 경력

1953년 제19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1954년 제11회 골든글로브시상식 드라마부문 여우주연상

1954년 제7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54년 제8회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1955년 제12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여자인기상

1959년 제2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1959년 제7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1960년 제13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65년 제18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여우주연상

1968년 제22회 토니상 특별상

1990년 제47회 골든글로브시상식 평생공로상

1992년 제45회 영국아카데미시상식 평생공로상

1993년 미국배우조합협회 평생공로상

1993년 제65회 아카데미시상식 진허숄트박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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