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불화

석굴암 백년의 빛

선바우1 2018. 3. 16. 22:34


석굴암 백년의 빛

 

  

아래는 [석굴암 백년의 빛]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글입니다.

일제와 광복후의 석굴암 보수와 관련된 사진자료들이 올라와 있어 퍼왔습니다.

http://cafe.daum.net/amitaba/8chX/155


1909년 4월말에 석굴암을 찾은 조선총감부의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석굴암에서 찍은 사진


돌과 기와 더미가 쏟아져 폐허가 되다시피한 석굴암에서 검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일본인 들이 본존불의 무릎과 돌위에 함부러 앉아 있다.

이들이 석굴암을 다녀간 후 석굴암 감실 앞쪽에 봉안되어 있던 보살상

2구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현재까지도 2구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1910년(추정) 어느 화창한 봄날에 석굴암을 찾은 

사람들이 기념사진. 

 

앞쪽에 있는 세 명의 민간인은 서 있거나 돌무더기에 앉아 있는데 반해,

사진 중앙에 앉은 제복차림의 관헌은 본존불 대좌에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걸터 앉아 있다. 일본인에게 석굴암은 한낱 점령지의 전리품일 뿐.


 

석굴암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총독부 관리나 일본에서 건너온 관광객,


그리고 수행여행단이 거쳐가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 올 때 손길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낙서를 남겼다. 

본존불 앞 쌍석주에 빼곡하게 낙서가 적혀 있다.


 

석굴암이 인기를 끌자 동양헌 사진관에서는 석굴암에

관한 설명문과 약도를 곁들인 사진첩을 발간. 


조각상을 합하여 모두 36매의 사진인데 1912년 늦가을에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석굴암석불위치약도'를 잘 보면.

앞 쪽 좌우에(1,2,3과 25,26,27번) 모두 여섯 구의 팔부신 중만이

적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은 모두 8구인데

아수라상과 금시조상이 안보인다. 

이 두구의 상은 나중에 발견된다....동양헌 사진첩을 비롯하여 석굴암

관련 사진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카테가 1912년 11월 8일에 총독부를 방문한 후 

보수공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1913년 10월부터 1915년 8월까지 1차 수리

공사가 시작. 2차공사는 1917년에, 3차공사는 1920년-23년에 진행. 

석굴암이 창건된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지만 석실법당 전체를

해체하는 공사는 역사상 처음이었다.


 


1938년 석굴 전체가 해체된 직후의 모습.

 

 

석실법당 전체를 해체작업할 때 본존불과 천개석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겹의 비계를 설치. 


본존불과 천개석은 나중에 재조립할 때 중심을 잡기위해서라고 함.


 

전실의 팔부중 가운데 빠져 있던 금시조상과

아수라상이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석굴암 재조립을 위한 측량 도면이 완성된

상태라서 양쪽에 3구씩 세워놓기로 한 계획을 바꿀 수가 없었다. 

래서 옹색하게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세 구의 신중상옆에 새로 발견한 아수라상과 금시조상이 꺾인 채 배열되었다. 


이 배치는 196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복원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그대로 계속됨.

 


 

이렇게 해서 석굴암에 대한 보수공사가 끝나고

기차터널처럼 변한 석굴암 입구가 만들어졌다. 


원래 주실 앞에 세워져 있던 전각을 만들지 않아 전실과 주실이 모두

습기와 곰팡이로 덮이게 되어버린다.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주실 위에

잡석과 기와가 덮여 있던 원래 구조를 버리고 시멘트를 발라서

석실내부가 누수로 인해 청태와 오염물이 끼어 석실환경이 급속도로 악화된 것.

급기야 일제는 1927년에 석실내부의 오염물을 제거하기 위해 증기보일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석굴암 보존에 더욱 큰 해를 끼치는 장치였다.

 



 내부 환경과는 달리 외부는 말끔히 단장되어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코스가

되었다.때론 수학여행으로, 때론 단체관람으로, 그리고 때로는 몇몇 회원들의

기념관광으로 석굴암은 몸살을 앓게된다.


 

석굴암은 바다와 인접한 해발 565미터의 산중에 위치해 있다. 

눈비와 안개가 잦고 바람이 거세고 겨울에는 평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온도가 내려간다.  1962년 기상자료에 의하면, 연중 123일 안개가 끼고,

134일 비가 내리고, 40일 눈이 퍼붓고 110일 결빙. 

여기에 염분이 섞인 해풍, 벌레와 짐승 등의 침입도 석굴암 훼손의 큰 원인임. 


이런 상황속에서 석굴암 조각들이 천 년의 세월을 잘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석조지붕 상부에 기와층과 토석층이 번갈아 덮여 있고 맨 위에 기와층이 덮여 있었기 때문. 

그리고 입구에 보호전각이 있어 비바람과 짐승으로부터 석굴을 보호해서임


이런 구조적인 이해가 없이 진행된 보수공사로 인해 비가 내리면

천정석이나 벽면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흐르게 된다. 

일제가 시멘트 봉분을 만든 후 50년동안 파괴된 속도는 신라에서 일제시대

까지의 1.200년동안 훼손된 속도보다 훨씬 더 심해짐. 

 

아래사진은 빗물이 흘러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11면관세음보살상의

모습이다(1930년대)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석굴암을 돌볼 겨를이 없이 방치한 가운데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진은 본존불의 어깨와 가슴에 새똥이 말라

붙어 있고 온 몸에 곰팡이와 이끼로 심하게 오염된 사진. 

1951년 김한용의 사진. 


1960년대 들어서 문화재관리국의 주도하에 복원공사가 추진. 


시멘트 두겁을 철거하고자 했으나 견고한 두껍을 철거하는 충격으로 내부

조각상에 피해가 예견되어 결국 원래의 두겁에서 1미터 이상의 공간을 두고

새로 시멘트 두겁을 시공하였다.

결국 2중의 시멘트 구겁을 시공하게 된 것.

일제가 만든 기차터널같은 진입로의 옹벽도 제거되었다. 

옹벽이 제거되자 전실의 공간이 넓어져 구부러졌던 평면도가 반듯하게 펴짐.


 

그 결과 구부러진 채 배열되어 인왕상과 마주보고 있던

아수라상이 반듯하게 배열되었고,

금시조상도 제자리를 찾고. 십일면 관세음보살의 머리 위의 화신불 중

잃어버렸던 상을 복원했다. 그래서 한동안 '9면 관세음보살'이라 불렸던

상이 다시 '11면관세음보살'이 되었다.

사천왕 중 북방 다문천왕의 보탑도 되찾았다.

 


 

본존불의 이마에 새겨졌던 백호도 원상복구되었다. 

직경 4cm에 두께 0.7cm 인 국산 수정을 순금판에 받쳐 시공.

이런 노력과 의지속에서 1997년 석굴암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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