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역사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선바우1 2018. 3. 20. 21:21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석굴암(국보 제24호)은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백65m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서기 735년에 세운 것이다.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포함해 모두 40개의 불상이 있었는데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 번째

감실 두 개의 불상이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기 때문에 현재 석굴암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수는 총 38구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높이가 3.4m에 이르며 대좌까지 합쳐 5m나 되는 큰 불상으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창건해 774년 혜공왕대에 완공된 석굴암은 그 탁월한

예술성을 인정받아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석굴암이 창건된 신라 경덕왕 시기

 

 삼국을 통일한 지 이미 80여 년, 백제 및 고구려의 유민들을 무마하기 위한 

작업이 정리되고 당나라와의 알력도 해소되었다. 즉, 나당전쟁 후의 수습기를 지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 당시의 불상과 사찰 조성기술 또한

극에 달한 때였다. 일례를 들어보면, 만불산이라는 가산(假山)을 만들어 그 안에

불상 1만구를 모시게 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헌납하였더니, 당 태종이 이를 보고,

 "신라인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요, 사람의 기교(技巧)가 아니다"

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에 사용된 조각품들의 재료는 석고이며,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이나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석회석이

원재료이다. 석회석은 경도에서 활석 다음으로 무른 돌로 조그마한 조각칼로 비누를

조각하는 것처럼 쉽게 정교한 인물상들을 조각할 수 있다. 




천장 덮개 돌은 손잡이가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 2.47m, 높이 1m, 바깥쪽 지름 3m나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t이나 된다. 

축조 당시 생긴것으로 보이는 연화문의 금은 크레인도 없던 시절의 고충을 말해준다.

 



석굴암에서 학자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본존불 이마 한가운데 있는 백호(白虎, 

성인의 32가지 상호 중 하나)이다. 이것을 다면체로 깎아 햇빛을 반사해 후면에 

있는 11면 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추게 했다는 설이 있다.

이를 위해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 번째 감실 두 곳에 있던 불상(일본인이 반출한

것을 뜻함)도 본존불처럼 이마에 백호 구슬을 지니고 있어 동트는 새벽의 첫 번째

빛이 석굴암 입구와 그 위에 달린 광창을 통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와 닿고,

반사된 빛이 두 보살상의 백호를 통해 다시 한 번 굴절되어 나온 후 11면 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새벽의 짧은 한순간에 석굴암 내부의 조명 효과를 극적으로 제고

한다는 설명이다. 즉, 일본인들이 반출한 감실 내의 두 보살상과 본존불 이마

백호가 다시 원위치에 선다면 이런 효과를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이를 위한 기초 연구를 계획 중이다. 


또 석굴암은 자연환경을 이용한 자동 온도조절장치를 사용했다. 

  

동굴은 햇빛과 공기가 차단돼 습한 것이 사실이지만 석굴암은 이 부분에도

과학의 원리를 받아들인 것. 바로 지하수를 이용한 것이다. 지하수를 끌어와 바닥

밑을 흐르게 해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벽면에 이슬이 맺히는 현상을

방지했다. 요새 콘크리트로 덮고 인공적으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면서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지만 결국은 통풍과 습기가 자연조절되던 원래의 구조를 잃어버렸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

보냈던 것이다. 

 

통풍 시설로는 감실의 환기창을 들 수 있다. 현재 10개의 감실 중에 8개에

연기보살 좌상들이 각각 안치되어 있고 2개의 감실은 비어 있다. 그런데 이 좌상의

두편으로 조그만 구멍이 나있어 외부로 바람이 통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의 감실은 일제 강점기 때의 보수 공사로 감식 석재들이 모두 교체되면서

통풍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환기창들은 모두 사라졌다

 

 

 



A: 감실이라고 불리우는 통풍구, B: 전실, C: 주실-그림3)석굴암의 내부구조


우선 석굴암 주실에 위치한 10개의 감실과 감실을 받치고 있는 돌 사이에는

작은 틈이 존재해 공기를 순환시킨다. 

또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위에 위치한 광창은 채광은 물론 원활한 통풍이 이뤄진다. 

이밖에도 본실 지붕 외벽엔 직경이 10㎝가 넘는 돌들이 1m가량 쌓여있는데

이 자갈층을 통해서도 공기는 안팎을 넘나든다.
자갈층은 제습 기능도 겸비했다.

외부의 습하고 더운 공기는 자갈층을 지나며 수증기를 자갈층에 남기고 차가워져

내부로 유입된다. 때문에 석굴암은 차고 건조한 공기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자갈층은 낮에는 물을 머금고 있다가 밤이 되면 온도차에 의해 바깥으로 수분을

방출하고 다음날을 준비했다.

이런 겉보기에 엉성해 보이는 구조로 놀랍게도 천년이나 내부의 석상들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록.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703년(숙종 29) 종열(從悅)이 석굴을 중수하고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 대겸(大謙)이 다시 중수했다.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에 따르면, 1688년(숙종 14) 5월 15일 그가 이 곳을

찾았을 때에는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고, 

불국사의 골굴암(骨窟庵)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관광 순례지였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 예술 작품을 남겼다. 

영조 때 사람 남경희(南景羲)는 <우중숙석굴(雨中宿石窟)>과 <석굴>을, 같은 시기의

이관오(李觀吾)는 <석굴암>을, 최천익(崔天翼)은 <유석굴증등여상인(遊石窟贈登如上人)>

이라는 시를 지었다. 정선(鄭선)은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2권 중에 골굴과 석굴을 남겼다. 이 화첩은 석실 입구에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목조 전실을 첨가하게 했다.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석굴을 크게 중수했다.

이로 인해 1962년 대수리 때 부근의 노인들은 이 절 절을 가리켜 '조가절(趙家寺)'

이라고 지칭했다.

또한 그들의 어린 시절에는 향화(香火)와 공양이 그치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도 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이 1907년 무렵 한 우편배달부에 의해 처음으로 이 절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석굴암의 수난


석굴암은 조예상이 중수한 이후 세간에서 잊혀졌다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석굴암이 발견된 이듬해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석굴암의 조각상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를 눈치챈 현지 관리가 석굴암 반출을 거절하자 총독 데라우치가

현지를 시찰하고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맨위에 나오지만 반출-이라 쓰고 도굴이라 읽는다-된 것들이 좀 있다.]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

공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그 후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지만 근본적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되어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계의 소음때문에 석굴암에 미세한 금이 가고있는 상태다.


1913년 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시멘트는 수화작용으로 물과 결합하면서 강도를 주는 칼슘실리케이트(CaSiH)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을 형성한다. 

시멘트가 세월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것은 일단 굳어진 시멘트 속에서도 계속적인

결합작용이 일어나 칼슘실리케이트의 양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석과는 상극이었다. 

현재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참고로 전 서울대 물리학교 교수인 남천우 박사는 석굴암 보존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석굴암 보존의 위기는 개악 수리공사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래서 연구 보고를

핑계로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도 습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즉 배후에 만든 이중돔 사이 공간의 온도를 밤중 대기온도보다 4, 5℃ 높게 유지

시켜 주고 출입문을 개방하면 결로 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관람객의 출입도 가능해지며 공기 건조 장치도 필요

없고 진동과 소음도 저절로 사라진다. 굳이 수억 원을 새로 들여서 기계실을

밖으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정교한 인공건축물
 

순수 인공 석굴인 석굴암 내부는 철저한 좌우 대칭으로 이뤄졌다.

석굴암은 앞은 사각형이고 뒤는 원형이다. 사각형의 전실에는 양쪽에 각각 4개의

입상이, 비도(통로)에는 2개의 입상이 마주보고 서 있다. 원형인 주실엔 15개의

입상이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을 둘러싸고 있다.

 











 

수리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석굴암은 더욱 과학적이다. 

석굴암은 12당척(1당척은 29.7㎝)을 기본으로 설계됐다. 

주실은 반지름이 12당척인 원형이며 참배자의 위치는 12당척의 두 배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참배자가 본존불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다. 

또 감실은 12당척의 정사각형이 만들어낸 황금비에 위치한다.

정확한 비율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본존불상의 얼굴 너비는 2.2자, 가슴

폭은 4.4자, 어깨폭은 6.6자,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로 1:2:3:4의 비율을 갖는다. 

이밖에도 석굴함은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의 사용을 비롯해 정삼각형과 수선의

사용, 원에 내접하는 정6각형의 사용 등 다양한 수학적 기법들이 사용됐다.

 

우리 불교 건축의 백미인 석굴암은 내부 반지름 12자(1자=29.7㎝)를 기본으로

너비와 높이 등이 계산됐다.(그림1) 석굴암 내부의 본존 불상은 얼굴과 가슴과

어깨와 무릎의 비율이 각각 1:2:3:4의 비율로 일정하다.(그림2) 돌로 쌓은

돔 형태의 천장에는 2m가 넘는 30개의 끼임돌이 비녀처럼 박혀 있는데,

그 간격이 1㎜의 오차도 없다. 원의 둘레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긴데, 3.14로

시작되는 원주율을 소수점 다섯째 자리까지는 계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등에는 3:4:5의 비례가 쓰였다. 

우리 수학에서는 이를 ‘구고현’이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라 한다. 밑변이 ‘구’, 높이가 ‘고’, 빗변이 ‘현’이다.

 

 

 

왼쪽 이미지와 글 출처: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982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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