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실미도 사건
노량진 유한양행앞 버스탈취 2시간 동안 승객인질 하고 있는 현장
영화가 아닌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실미도 부대원들의 버스 난동사건
유한양행 앞 군경과 대치하고 있는 현장
이천까지 택시를 타고 도피했던 손일병
실미도 교관과 부대원들
승객을 내리게 하고 자폭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는 현장
자폭한뒤의 버스 숨져있는 군인의 발이 보인다 아~실미도
사건의 내용
실미도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龍游洞)에 딸린 무인도로,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미도사건 은 1971년 8월 23일 이 섬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 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을 말한다.
이 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되었고, 일명 '684부대'로 불린다.
같은 해 1월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목적은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金日成 )을 죽이는 것이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 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나머지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