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깨달은 이의 가르침
무비스님강설
불교라는 낱말을 일반적인 어휘만으로 해석하면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 '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들을 깨닫게 해 주는 가르침'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주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로서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根機)에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십이분교가 있게 되느니라." 결국 조주스님의 말씀은 근기에 따르다 보면 다종다양한 차별적인 교리가 있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근기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이해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삼승십이분교는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근기에 따라 그에 대한 교법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근기에는 물론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기에 따라서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여러 가지 차별된 이야기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조주스님의 말씀은 사람의 수준에 따라서 낱낱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조주스님의 생명선이자 불교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본다면 삼승십이분교니, 원시불교니, 근본불교니, 부파불교니, 대승불교니 하는 그런 복잡한 구별은 없습니다.
불교의 교설은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함부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적인 문제 (자신에 대한 깨달음)에서 볼 때, 그때그때 방편으로 된 여러 가지 교설이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의 성전처럼 간단하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는통칭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방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의 내용을 모두 알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설사 안다고 해도 간단하게 '불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또 전체 내용을 하나하나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도 끝이 없어서 대단히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할 때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부처(佛)란 인도말로 붓다(Buddha)라고 하며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결국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깨달음, 참 나의 깨달음1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불교라는 말 속에는 깨달음이라는 근본 뜻이 숨어 있습니다.
불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깨닫는다는 말을 버리면 사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깨달음의 문제를 떠나서는 불
교를 논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근본이 깨달음에 있다고 한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불교는 삶 그 자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바꾸면 불교는 깨달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자기 자신은 깨달음 그 자체라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불교는 삶 자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곧 깨달음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신행의 목적이며 또한 불교공부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나아가려고 하는 이 사실보다 더 큰 신비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깨달음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장애물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깨달음의 실체는 뜻밖에도 여기 이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이 자리에 없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때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과연 진리의 실체인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까 하고 의심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깨달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깨달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닫고자 하는 일을 두려워한다거나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