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탄신일 (釋迦誕辰日)
부처님 탄생한 날. 초파일(初八日)이라고도 한다.
BC 563년 4월 8일(음력) 해뜰 무렵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방)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와 마야(Maya)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經)과 논(論)에 석가가 태어난 날을 2월 8일 또는 4월 8일로 적고 있으나,
자월(子月:지금의 음력 11월)을 정월로 치던 때의 4월 8일은
곧 인월(寅月:지금의 정월)을 정월로 치는 2월 8일이므로
음력 2월 8일이 맞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 등지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4월 8일을 석가의 탄일로 기념하여 왔다.
한편 1956년 11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대회에서
양력 5월 15일을 석가탄신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을 석가탄신일로 보고 기념한다.
참고 자료
[석가
불교의 개조.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사찰이나 신도들 사이에서는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의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1. 부처님 오신 날(석가탄신일)의 의미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 존귀하도다.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신 후
위와 같은 외침을 내셨습니다.
이 외침은 장차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언, 즉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눈먼 중생들을 위하여 걸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언은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6년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을 설함으로서 시작하였고,
이후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들을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신 분으로 부처님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탄생을 경배하는 것은 물론 「참 나」를
찾겠다는 분발심을 내고 부처님의 중생구제
원력을 세워 실천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75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1945년 미군정에 의해 크리스마스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지
무려 30년이나 지난 후의 일로, 불교계에서 종교의 형평성을 들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우려곡절 끝에 이루어진 일이랍니다.
2. 세계속의 부처님 오신 날
한국 이외의 많은 나라에서도 부처님 오신 날을
국민적 축제로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 국가에서는
부처님의 탄신일인 웨삭(Wesak-Buddha Day)
①이 1년 중 가장 큰 축제일입니다.
이때가 되면 지금도 불교도들은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등을 만들어서 대문에 걸어 무명중생을 위해 밝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자신들의 미래 희망을
담은 등을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자식이 항공기 조종사를 원하면
비행기 모양의 등을 만들고 배를 타기를 원하면 배 모양의
등을 만들기 때문에 아주 다양한 종류의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관욕(灌浴)②의 풍습이 있습니다.
이 풍습은 농경 사회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물 축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풍습입니다.
한국에서도 근래에 와서 관불 또는 관욕이라고 하여
정수리에 물을 뿌리는 풍습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3. 등불을 밝히는 이유
설일체 유부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등불 유래를 살펴보면
부처님 당시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등불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 데서 유래됩니다.
이때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기름등불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공덕의 인연을 맺을 수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기름 한 되를 구하여 불을 밝혔습니다.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거의 꺼졌으나 이 난타의 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음을 보고 아난과
목견련 존자가 이를 보고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때 난타여인이 부처님 전에 예배하자 부처님께서는
“네가 오는 세상에 이 아승지겁을 지나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동광여래라 할 것이다.”
고 수기를 내리셨습니다. 난타는 감시하며
출가하기를 청원하여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운 사람은, 부처님 전에
지극정성으로 기원봉양하면 무량한 공덕을 입을 수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밝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게 되었음이 등불을 밝히게 된 유래입니다.
◆ 부처님 오신 날인 음력 4월 8일을 ‘사월초파일’로 읽는 까닭은?
4월 1일은 사월 초하루, 하루
4월 2일은 사월 초이틀, 이틀
4월 3일은 사월 초삼일, 사흘, 초사흗날, 사흗날
4월 8일은 사월 초팔일, 초여드렛날
음력 4월 8일로 지정된 부처님 오신 날이 우리나라 전통 발음을 따라 읽다보니까
고유명사화 된 것 같습니다.
◆ 불교기의 다섯 가지 색깔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불교기는 1950년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정식 승인되었으며 현재 세계 불교국가의 불교단체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교기의 5색의 가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5색의 세로선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원 불멸하다는 뜻을 상징 합니다.
․ 청색 :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부처님의 법을 구하며
살아가는 힘을 의미하므로 정근과 지혜를 뜻한다.
․ 황색 : 찬란한 부처님 몸의 빛과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하며 금강의 지혜를 뜻한다.
․ 적색 : 대자 대비한 법을 닦아 항상 쉬지 않고 수행에 힘쓰는 자비와 정진을 뜻한다.
․ 백색 : 깨끗한 마음으로 온갖 악업과 번뇌를 없앤 청정의 지혜를 의미한다.
․ 주황 : 수치스러움과 그릇된 길로의 꾀임에 잘 견디어 내는 인욕의 지혜를 뜻한다.
◆ 불교의 만(卍)자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만(卍)자 무늬는 고대 인도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태양이나 신령한 빛의 상징이나
흐르는 물을 상징한다는 등 의견이 다양합니다.
인도어로는 스바스티카(Svastika)라고 합니다.
이 무늬의 본래 모습은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나
중국으로 와서 당나라 때 만(卍)자라는 한자어가 만들어 졌습니다.
오른쪽으로 도는 것이나 왼쪽으로 도는 것이나
굳이 구분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만(卍)자가 불교에서 받아들여지고 나서 부처가 지닌
성덕과 길상(吉祥), 행복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 깔았던 풀잎이 만자 모양을
한 길상초였다는 데서 의미가 유래되었습니다.
이러한 만자는 대승불교에서만 사용되고 있고
남방불교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만(卍)를 보면 L자의 4개로 보아 생명(Life),
광명(Light), 자비(Love), 자유(Liberty)등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나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서양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1) 웨삭(Wesak-Buddha Day) : 베사카(Veskha)라고도 하는데
음력 4월 중 달이 가장 큰 날인 만원일로, 음력 4월 15일을 말합니다.
2) 관욕의 유래는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했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나 목욕을 씻겨준 데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의미▒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 아래서 탄생하셨다.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걸음을 걷고 난 뒤, 두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를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 존귀하다.
세계의 고통 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 외침은 장차 고통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선언, 즉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눈먼 중생들을 위하여 걸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부처님의 이러한 선언은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6년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다섯 비구를
상대로 법을 설함으로서 시작하였고,
이후 45년 동안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중생들을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하셨다.
≪석가모니부처님 탄생게≫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씀을 누가 하였을까요?”라고 질문을 하면
굳이 불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단숨에 "석가모니부처님입니다." 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만큼 이 단어의 의미하는 바가 평등성,
자아존중, 인간사랑을 내포하고 있기에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인구회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정확한 탄생게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자를 통털어서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게의 全文은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입니다. 이 탄생게의 뒷부분인
"三界皆苦我當安之삼계개고아당안지" 가 바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사바세상에 오신 목적 즉 일대사인연인 것입니다.
"온 세 상이 모두 고통 속에서 헤매이니
내가 마땅히 그 원인을 밝혀 이 세상을 밝고 편안(안락)케 하리라." 라는
중생구제의 의지가 함유된 뒷부분이 바로 탄생게의 핵심 요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에게 보장된 왕위계승의
부귀영화를 택하지 않고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자신을 버림으로써,
마침내 영원히 세상을 밝히는 인류의 등불,
삼계도사 사생자부(三界導師 四生慈父)가 되셨습니다.
[출생】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山)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샤키야족 釋迦族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키야족은, 그 왕호가 정반왕, 그리고 정반왕의 동생이
백반(白飯)·감로반(甘露飯) 등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 미작(米作)
농경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는 크샤트리야 계급출신이라고 하지만, 샤키야족
내부에 카스트의 구별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가 순수한 아리아인(人)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네팔계(系) 민족에 속하는 종족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리아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워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Lumbini) 동산에서 석가를 낳았다.
이는 아소카왕 阿育王이 석가모니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이 곳에 세운 석주(石柱)가, 1896년에 발견·해독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으나,
그 중 유력한 것은 스리랑카의 《도사(島史) Dipavamsa》
《대사(大史) Mahavamsa》에 근거하여 불교학자 W.가이거가
주장한 BC 563∼BC 483년 설이다.
이 설은 중국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紀)》에
전하는 중성점기(衆聖點記), 즉 불멸(不滅) 후 최초의
율장(律藏)이 결집되었을 때 제1점을 치기 시작하여
매년 1점씩 쳐서, 제(齊)나라의 영명(永明)
7년(AD 490)까지 975점에 이르렀으므로 불멸이 BC 485년이라는
설(BC 565∼BC 485년)과도 대략 일치된다.
그 외에 BC 624∼BC 544년설, BC 463∼BC 383년설 등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전자를 채용하고 있다.
【출가와 성도】
석가모니는 생후 7일에 어머니 마야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그 후 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는데,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기예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 생활은 물질적으로는 매우 풍부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그는 16세에 결혼하였다.
부인은 야쇼다라 耶輸陀羅라고 하며,
곧 아들 라훌라 羅羅도 얻었다. 이같이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던 중 석가모니는 인생의 밑바닥에
잠겨 있는 괴로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전설적으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모습,
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출유(四門出遊), 또는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써 설명된다.
석가모니는 29세 때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남쪽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2명의
선인(仙人)을 차례로 찾아,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웠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통일에 의하여 하늘에 태어나
보려는 것이었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방법으로써는
생사의 괴로움을 해탈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출가자의 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였으나,
신체가 해골처럼 되었어도 해탈을 이룰 수는 없었다.
고행은 육체적인 면의 극소화를 통하여 정신의
독립을 구하는 2원적 극단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고행을 중단하고,
다시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에 자리잡고 깊은
사색에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을 정각(正覺:abhisambodhi)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하여 《아함경(阿含經)》에는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사제(四諦:苦·集·滅·道의 네 진리, 즉 현상계의 괴로움과
그 원인 및 열반과 그에 이르는 길)·십이인연(十二因緣)·
사선삼명(四禪三明) 등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선정에 의하여 법(法:dharma)을 깨달았다고 하겠다.
즉 선정은 강렬한 마음의 집중이며,
여기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直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如實知見:있는 그대로 옳게 봄)이다.
이 지혜가 진리를 깨달아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하게 되었는데,
공포에도 고통에도, 나아가서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는 부동(不動)의 깨달음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해탈(解脫:moksa)이라고 하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하여 깨우쳐진
진리를 열반(涅槃:nirvana)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해탈은 참 자유, 열반은 참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설법】
석가모니는 성도 후 5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기쁨에 잠겨 있었는데, 범천(梵天)의
간절한 권청(勸請)이 있어 설법을 결심하였다.
악마의 유혹, 설법주저(중생이 이해 못할 것을 염려),
범천권청 등은 마음속의 일을 희곡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이나,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석가모니는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Mrgadava)에서,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 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와
사제에 관하여 설하였다. 이것을 특히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법을 깨달아 제자가 되었다. 여기에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그의 설법을 통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그 교화의 여행은 갠지스강(江) 중류의 넓은 지역에까지 미쳤다.
제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였으며,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 《율장》 등의 원시불교
경전을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구전(口傳)되어 오던 것을
후세에 편집한 것이지만, 후세에 정형화된
다음의 교설을 통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원형 또는
그 핵심을 알 수 있다. 삼법인(三法印:一切皆苦·諸行無常·諸法無我 또는
一切皆苦를 빼고 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사제·팔정도(八正道:正見·正思·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무기(無記:일체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
실천을 지향함을 말한다)·법(法:모든 존재를 일관하는 보편적 진리)·
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존재의 구성요소)·
육근(六根:법의 분류로서 眼·耳·鼻·舌·身·意의 주체.
이에 대응하는 色·聲·香·味·觸·法의 객체,
즉 6境을 더한 十二處와, 거기에 眼識 등의 6식을 추가하여
十八界를 말하기도 한다)·연기(緣起: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하여 성립함을 말함.
12연기가 특히 유명하다)·열반·일체중생의 평등 등이 그것이다.
【입멸(入滅)】
혹서의 중부인도(印度) 각지를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의 중병에도
불구하고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이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여러 가지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
법을 등불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하여 수행하라”
또한 자기가 죽은 뒤에 “교주(敎主)의 말은 끝났다.
우리의 교주는 없다고 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내가 설한 교법(敎法)과 계율이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등이 그것이다.
마침내 쿠시나가라(Kusinagara)의 숲에 이르렀을 때,
석가모니는 심한 식중독을 일으켜 쇠진하였다.
“나는 피로하구나. 이 두 사라수(沙羅樹)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향하게 자리를 깔도록 하라”고 말하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운명이 가까웠음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
석가모니는 “슬퍼하지 마라. 내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느냐.
사랑하는 모든 것은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아니되느니라.
제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말하리라. 제행(諸行)은
필히 멸하여 없어지는 무상법(無常法)이니라.
그대들은 중단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니라”고
설한 후 눈을 감았다. 석가모니의 사후 그의 유해는
다비(茶毘:화장)되고, 그 유골舍利:sarira은
중부 인도의 8부족에게 분배되어 사리탑에 분장(分藏)되었다.
이 사리탑은 중요한 예배대상으로 되어 후에
불탑신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승(大乘)불교에서는 불타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 가해져 불타에는 법신(法身:진리로서의 불타)·
보신(報身:보살의 願·行에 의하여 성취된 불타)·응신(應身:
중생구제를 위하여 상대방에 상응하게 나타나는 불타)의
3신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2,500여 년
전의 인도라고 하는 특정의 지역·시대에 나타난 응신의 불타로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입장에서 석가모니불은 위의 3신을
모두 갖추고 있는 분으로 숭배되고 있다.
그의 탄생지 룸비니 동산, 성도지 부다가야,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 입멸지 쿠시나가라는 4대 영지(靈地)로서
중요한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성도·입멸의
월·일에 관하여 최고(最古)의 문헌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탄생을 4월 8일, 성도를 12월 8일,
입멸을 2월 15일로 한다.
또한 남방불교에서는 탄생·성도·
입멸이 모두 바이샤카월(Vaisakha 月:4∼5월)의 보름날의
일이라고 하여, 이 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한다.
중국·한국 등지에서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8시기로 구분하여
팔상(八相:兜率來儀相·毘藍降生相·四門遊觀相·踰城出家相·
雪山修道相·樹下降魔相·鹿苑轉法相·雙林涅槃相)이라고
부르는데, 회화나 조각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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