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亭子기행] - 골육상잔의 비극의 유배지 몽한각(夢漢閣)

선바우1 2019. 1. 19. 19:20



양녕대군의 자취를 이어 초야에 묻힐 것을 결심했고


담양 몽한각(夢漢閣)은 전남 담양군에서 동쪽 방향 창평읍에 있다.

창평읍내 시장을 사거리를 지나 곡성쪽으로 향하면 대덕면 소재지에서

곡성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나온다. 소재지에서 우회전하면 잘 꾸며진 소나무림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곧 시멘트길로 이어지고 동양화에나 나올 듯한 멋스러운

노송 한구루를 끼고 좌회전해 처다보면 옛 고가가 있는데 이곳을 바로 '꿈속의 한양'

이라는 의미심장한 의미의 목조건물이 몽한각(夢漢閣)이라 했다.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왕족 추성수(秋城守) 이서

(1482 성종 13∼?)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재실이다. 유배지 시절 그의 시에

 나온 말을 따서 그의 재실을 몽한각이라고...

이서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무신으로 최초로 병조판서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호는 월봉(月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의 7대손이며,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자로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행사용(行司勇)·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무인으로서 그 만이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

그 뒤 장단부사로 경기방어사를 겸했고,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金瑬)· 이귀

(李貴) 등과 함께 공을 세워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완풍군(完豊君)에 봉해졌다.

이곳은 조선왕조의 정원이라고 하는 비원에 가면 석축을 쌓은 화단에는 앵두

나무가 무척 많이 심어져 있다. 그것은 바로 앵두나무가 상징하는 우애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면 왕족들은 서로가

왕권을 잡기 위하여 골육상잔의 비극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

왕권정치의 특징이었다.


특히 조선 초기 왕자의 난은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려주는 사례로 후인들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 하겠다, 이후 조선사회가 

 진행되면서 권력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 속에 왕손들은 그런 정쟁에 쉬이

휩싸여 자신의 몸을 보존하기가 힘들었던 경우도 많았다. 몽한각은 그런

왕족들의 싸움과 관련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라는 사람이 이과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1510년 중종 5년

전라도 담양으로 귀향을 오게되고 14년 만인 1523년(중종 18) 39세 되던 해에 귀양이

풀렸어도 구차한 서울살이를 택하지 않고 '夢漢' '꿈속에서 한양'이라고 치부하고

조용히 은거하며 옥동금(玉洞琴)을 팅기며 시가를 읊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살아가다

이곳에 한 많은생을 마감하고 뼈를 묻혔다.

그가 한양길을 멀리한 이유의 변은 지은 낙지가(樂志歌)에 남기고 있다.

'잔물결에 정을 품고 그 근원을 생각해 보니 연못의 잔물결은 맑고 깨끗이 흘러가고

오래된 우물에 그친 물은 조용히 고여 있다. 짧은 담벽에 의지하여 고해를 바라보니

욕랑(慾浪)이 하늘에 차서 넘치고 탐천(貪泉)이 세차게 일어난다. 흐르는 모양이

막힘이 없고 기운차니 나를 알 이 누구인가 평생을 다 살아도 백 년이 못되는데 공명

(功名)이 무엇이라고 일생을 골몰할까 ..."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백성들과의 평안한 삶을 읊은 낙지가는 가사문학

이 한글로 된 장문의 시라는 점에 반해 한문으로 쓰여진 담양지역에서 최초로 등장

한 한문가사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전체 내용은 중국의 처사(處士)

중장통(仲長統)의 삶을 흠모하여 권력 등 세속의 영화와는 멀리한 채 유배가사이면

서도 자연과 함께 하는 안빈낙도의 처사적 은일(隱逸)의 삶을 노래한 가사다



이곳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다 생을 마감하게 된 이서의 삶을 추모하는

후손들 중 조선 말엽 순조 3년(1803년)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징이

주축이 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남긴 글을 보관하기 위하여 몽한각을 지은 것이다.


몽한각(夢漢閣)을 지을 당시 창평현감이던 이훈징이 쓴 몽한각의 상량문에는

 "호화생활은 저 꿈 밖으로 보내 버리고 이 농사의 즐거움이 이 적막한데 있네. 반곡

(반곡은 처사가 사는 곳)의 세월에서 소요함은 운치 있는 남국의 선비이고/ 평장

(옛사람의 별장)의 꽃과 돌은 서호(西湖)의 주인이 분명하네"라고 적고 있다.

또 "양녕대군의 자취를 이어 초야에 묻힐 것을 결심했고/ 위령(緯伶)과 같은

회포는 매일 애국의 정신이 투철됐네. 부귀로써 자처하지 않고/ 나의 몸은 서울을

물러났네/국족으로 유락되어 타향의 포의한사를 지었고,/ 귀양이 풀리었어도

골 사람이 되었네" 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곳 창평에 대해서도 "음풍농월은 내 평생의 뜻이요, 산수(山水)를 사랑

함은 이 고장의 경치가 가상스럽네. 담양 고을에 정착하고 / 후산 마을 옆에 집을

지었다. 승지(勝地)를 용담대의 뒤와 안치의 남쪽에 얻었으니 산수가 좋고 /별서

(別墅)를 매봉 아래와 오동의 위에 이루었으니 곡식이 풍족한 골이다."라고 

 표현했다.

이서의 후손들은 이곳에서 정착하여 근동에서는 일가를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한기 같은 사람을 낳기도 하였다.

건물은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두 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두벌대의 기단 위에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전후좌우(前後左右) 반퇴(半退)집으로 쪽마루를

사방에 돌린 아주 특이한 형식을 하고 있다. 1916년 중수하였고,

1979년 지붕번와 보수를 하였다.

몽한각의 건축적 특색은 양쪽 익칸(翼間)의 전면부에서 보이는 퇴칸의 처리이다.

즉 일반적으로 이러한 형식의 건물에서 보이는 외목도리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와 석축 기단 위로 지어진 건물의 풍치가 빼어난 재실을 둘러보며

잠시 상념에 잠겨도 좋은 공간이다. 유배시절 그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두현운산장, 한창세월다, 금명금야몽, 비도한강파
(斗縣雲山壯, 寒窓歲月多, 今明今夜夢, 飛渡漢江波)'

"말처럼 매달린 구름 산 씩씩도 하여라 / 차가운 창에는 세월만 무수히 흘렀나니

 / 오늘 아침 오늘 밤 꿈에서라도 / 한강 물결 날아서 건너고 싶어"

풍겨오는 감정은 한양을 그리워 날아서 가고 싶은 한스러 웠으리라 추측해본다.

그도 그럴 것이 왕족으로 인생 한참 나이 25세 때 부터 29세 때까지 유배에 묶어 있으니 말이다.

왕실의 안녕과 고장의 안녕을 기원하는 한글로된 낙지가(樂志歌)의 끝 부분에는

"일단사 일표음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 하였어라.

 / 평원군의 식객삼천에 무수자천(毛遂自薦) 우습도다.

/ 삿갓과 도롱이로 두어두럭 밭을 가니 육군정승 소계자를 내어찌 부러워하랴

 / 대속의 수파람 부는 왕마힐은 내 벗이요. 냇가에 꽃을 찾은 명도선생 나의 스승일세

/ 글 그림이 써낼 수 없는 이내심정 뉘알소냐 중장통의 재미있는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보리"

14년간의 유배생활이 끝난 왕실의 자손이 권력을 마다하고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은일자적한 삶을 보낸 것을 보면 부귀와 영화보다 더 귀중한 것은 바로 사람다운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처지를 합리화하려는 뜻도

없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벽체는 헐어 내려 관리는 다소 허술했다지만 곧게 뻗은

소나무의 웅장함은 참 멋스러웠다

김은희 기자/
nox910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