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자료

사카키에 군악대까지..3·1운동 기폭제 된 고종의 국장

선바우1 2019. 3. 1. 16:08




고종 황제의 국장 사진첩.(고궁박물관 제공)

고종 황제의 국장 사진첩.(고궁박물관 제공)


(서울=뉴스1) 여태경 기자 = 일제의 폭압이 심해지던 1919년 1월21일 새벽 고종 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했다. 당시 68세였던 고종은 평소 지병이 없고 건강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 등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고종의 국장은 왕의 장례를 주관하기 위해 설치되는 국장도감이 아닌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에

의해 진행됐다. 이 때문에 조선 국왕의 국장이 아닌 일본 친왕의 국장을 기본으로 해 진행돼 대부분의 절차가

축소되고 변형됐다. 왕릉 조성 시간 등을 고려해 통상 5개월 걸렸던 인산(因山·발인)도 40여일로 대폭 단축됐다.

3월3일 거행된 인산에는 일본 장례 방식에 따라 사카키(신나무)를 든 일본식 행렬이 따르고 기마대와 군악대가

동원됐다.특히 왕의 관을 실은 대여 행렬과 왕의 혼백을 상징하는 신주를 모신 신연 행렬이 함께 이동하지

못하고 나뉘어 이동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국장은 장의괘 주관으로 일본식으로 진행하고, 왕릉 조성과

매장은 대한제국 황실 관리 기관인 이왕직이 조선식으로 진행하기로 하면서 각각 대여 행렬과

신연 행렬을 나눠 맡았기 때문이다.

고종 황제의 국장 사진첩.(고궁박물관 제공)

고종의 석연찮은 죽음과 국장을 지켜본 많은 민중들은 분개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고종의 발인을 보기 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만 40만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 황제 옥보와 옥책.© 뉴스1

고종 황제 옥보와 옥책.©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