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眞理)에 어두운 무명중생(無明衆生)과 깨달은 성자(聖者)와 차이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성상체용(性相體用)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인간(人間)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현상계는 상(相)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성자(聖者)만이 볼 수 있는
본체계(本體界)는 성(性)에 해당합니다.
범부는 현상(相)만 보고 본체인 성(性)은 못 봅니다. 성자(聖者)는 현상(相)과 본체인
성(性)을 한 번에 다 아울러 보는 것입니다.
체용(體用)이라, 체(體). 용(用)도 역시 성상(性. 相)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體)는 본성(本性)에 해당하고 용(用)은 현상적인 활동에(相)해당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형상계적인 미혹(迷惑)을 떠나서 참다운 본성계(本性界)를 깨닫는
데에 수행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현상계에서 학문적으로 불학무식(不學無識)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본성계
(本性界)를 깨달으면 성자(聖者)입니다. 진리(眞理)라 하는 것은 머리가 있고 없고 상관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본성(本性)을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본성계(本性界)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다 더 설명하기 위해서 십법계(十法界)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 십법계(十法界)
1. 지옥(地獄)법계
중생이 안 보이니까 부인합니다만 제법공(諸法空)도리에서 보면 천지우주 지옥법계
(地獄法界)가 텅 비어서 사람도 없고 오로지 부처님 광명(光明)뿐입니다. 우리가 불성(佛性)
에서 안보고 차별적으로 보면 사람도 있고 지옥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한정 한정된
안목으로 못 볼 뿐입니다.
지옥은 오역죄(五逆罪) 살부(殺父), 살모(殺母), 살아라한(殺阿羅漢), 파화합승(破和合僧),
불신출현(佛身出血)를 범(犯)하고 십악(十惡)을 지어 한열규환(寒熱叫喚)이라. 너무 춥고
너무 뜨거워 아파서 부르짖는 파한지옥(八寒地獄), 팔영지옥(八熱地獄)의 고(苦)를 받는
최하의 경계(境界) 지옥입니다.
2. 축생(畜生)법계
그 다음은 축생법계입니다. 이것은 일반 동물계를 말하는데, 소나 개나 돼(畜生法界)지나
새나 곤충이나 총망라한 말입니다. 오역 십악(五逆 十惡)을 범(犯)하여 탄담살육(呑噉殺戮)
즉, 서로 먹히고 잡아먹는 고(苦)를 받는 축류 · 축생경계라는 말입니다.
3. 아귀(餓鬼)법계
오역·십악을 범(犯)하여 주리고 목마른 기갈(飢渴)의 고통을 받는 나쁜(餓鬼法界)
악귀의 경계라는 말입니다. 귀신은 등급도 많고 수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귀신은 몸이
없는 의식만 있어서 신통(神通)을 합니다. 의생신(意生身)이라 마음만 먹으면 그냥 광파
(光波)보다도 더 빨리 순식간에 미국도 갔다가 영국도 갔다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귀신이
우리 사람 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가운데 특히 자기 배를 못 채워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귀신이 아귀(餓鬼)입니다.
4.아수라(阿修羅)법계
이것도 역시 사람 눈에는 안 보입니다. 이것은 귀신보다는 등급이 조금(阿修羅法界)더
높지만 성자(聖者)의 지위도 못되고 천상(天上)도 미처 못 되지만 신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경계가 아수라법계입니다. 보통, 자칭(自稱) 도사라 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 아수라에 잡혀서 그러는 경우가 있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수라는 십선(十善) 곧, 십선의 정도가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별로 덜 지키는 하품의
십선을 행하고 통력자재라(通力自在), 신통을 자재롭게 하는 것을 얻은 비인(非人)인, 사람이
아닌 경계라는 말입니다. 아수라들은 어떤 때는 우리들 앞에 극락세계 모양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야말로 찬란한 경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한 신통(神通)을 다 해서 자기도 보고
또 남에게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5. 인법(人法)계
그 다음은 인법계라, 이것은 사람 법계입니다. 오계(五戒)를 지키고 곧,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사음 하지 않고, 망령된 말 하지 않고, 술 먹지 않는 오계를 지키고 또는 중품의
십선을 닦아서, 비록 신통도 못하고 좀 어정쩡할망정 그래도 역시 아수라 보다는 더 정도가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랑으로 해야 합니다. 같은 십선도 아수라보다는 더 높은
십선을 닦아야만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오계를 지킨다거나, 중품(中品)의 십선(十善)을 닦아서 사람 가운데
고락(苦樂)을 받는 경계가 사람 법계입니다. 따라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실은 쉽지가 않습
니다. 우리는 뭐라 해도 역시 과거 전생에 오계(五戒)나 십선(十善)을 닦았기에 사람으로
이렇게 태어나 있는 것입니다.
6. 천법(天法)계
천법계라, 이것은 하늘나라 즉, 천상계를 말하는 셈이지요.
상품(上品)의 십선(十善)을 닦아 사람보다도 더 정도가 높게 지킨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오로지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정신통일의 참선으로 선정(禪定)을 많이 닦아
천계(天界)에 나서 정묘(靜妙)하고, 고요하고 묘(妙)한 안락을 얻는 경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면 천상이 사람 보다 훨씬 좋겠구나.' 이렇게 생각도
됩니다만 물론, 고요하고 묘한 안락을 받으니까 좋겠습니다만, 천상은 고요하고 안락한
삶을 사니까 거기에 집착하고 안주하여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고통(苦痛)도 있고 안락(安樂)도 있으니까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성불(成佛)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계는 너무 안락하여 거기에 머물려고
하지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천상(天上)사람들은 좀처럼 성불(成佛)을 못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슬퍼합니다만 거시적으로 보면
고생이 기연(機緣)이 되어서 무상(無常)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명곡에는 어떤 것이나 애조가 띠어 있습니다.
7. 성문(聲聞)법계
그 다음은 성문법계라, 성문(聲聞)부터는 벌써 성자(聖者)의 지위에 들어갑니다.
성인입니다. 부처님 법을 깨닫는 단계인 셈이지요,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의 성교(聲敎)
즉 부처님의 말씀에 의한 가르침인 교법에 따라서 사제(四諦)의 관법(觀法)을 닦는
경계입니다. 우리가 해탈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사제법문 즉
인생고는 무엇인가,
인생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인생고(人生苦)는 고제(苦諦)이고,
인생고의 원인은 집제(集諦)인 것이고, 인생고를 다 없애버린 이상적인 경계가 멸제
(滅諦)인 것이고, 고(苦)를 멸(滅)해버리는 길목을 말한 것이 도제라는 사제법으로
닦는 것이 소위 성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았지만은 아직은 구경지(究竟地)까지, 끄트머리인 정상을 다 올라
가지는 못한 경계를 말합니다.
8. 연각(緣覺)법계
그 다음은 연가(緣覺)법계라, 이것도 해탈(解脫)을 위하여 닦는 역시 도인
경계인데, 십이인연 연각법계(緣覺法界)법을 닦는 경계입니다. 12인연법도 역시
우리 사람이 ,현재 과거 미래의 삼세를 통해서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는가,
하는 사람의 생사래왕(生死來往) 즉, 낳고 죽는 경계를 말씀한 굉장히
중요한 법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현재의 나 밖에 모르니까 이런 몸뚱이에 집착하지만 과거의
나가 무엇인가, 또는 미래의 내가 무인가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현재의 몸뚱이에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아는 법문(法門)이 12인연법입니다.
9.보살(菩薩)법계
보살은 무상보리(無上菩提) 즉 위없는 진리를 위하여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보살법계(菩薩法界)를 닦는 경계(境界)입니다. 육도는 육파라밀(六波羅密)로 역시
보살이 닦는 행동 범주인데 이것은, 보시(布施)하고 또는 지계(持戒)라 계행
지키고, 인욕(忍辱)이라 참고, 진리를 위해서 자기 신명을 내걸고 부지런히 하고
정진(精進)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禪定), 그 다음은 참다운 지혜(智慧)로
바르게 행동하고, 그와 같이 보살이 닦는 여섯 가지 덕목이 육도(六度)입니다.
그러한 육도를 원만히 만행이라, 두루 다 행(行)한다는 말입니다.
육도만행(六度萬行)을 다 닦는 경계가 보살법계 입니다.
10. 불법(佛法)계
그 다음은 가장 최상의 불법계입니다. 부처는 자각(自覺)이라, 스스로 깨닫고
아울러 각타(覺他)로 남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이러한
도인(道人)들은 겨우 자각이라 자기 밖에는 못 깨닫는 단계입니다.
보살은 자각(自覺)도 하고 남도 깨닫게 하지만 아직 원만히 못되는 것인데
부처는 자기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것이 궁만(窮滿)이라 끄트머리까지 완전
무결하게 원만(圓滿)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처입니다.
■ 심즉시불(心卽是佛)
우리 마음이 저만치 간격을 두고서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심즉(心卽),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순간 사람 모습이나 우리의 본바탕, 본성은 부처입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 이 마음을 돌이켜서 저변(底邊)을 보기만 하면 밑창만
보면 그때 우리가 부처가 되고 맙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무치면 그 사람을 죽이고 맙니다.
그 마음은 분명 지옥(地獄) 마음입니다. 남을 미워할 때는 가장 저속한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본래 부처 마음은 일체 중생(衆生)을 깨닫게 하고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처의 마음자리를 안 놓치게 하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참다운
염불(念佛)입니다. 승찬(僧璨)대사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나 우리 범부(凡夫)의 망상(妄想) 사량분별(思量分別)으로 자꾸
헤아린다는 말입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금 우리가 사람으로서 현재는 인법계(人法界)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식이 인법계에 있으므로 이런 몸을 받아 나왔으나 우리 의식은 무한(無限)
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일체만물만법이
의식(識)뿐이라 우리의 의식은 사람이 되었으면 사람으로 아무개로 제한되어
있어서 현재 사람의 의식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우리가 쓰는 사람의 의식은 하나의 초점에 불과하고 우리의 잠재
의식인 의식의 심층(深層)가운데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가 다 감추어(藏)
숨어있는 동시에 천법계, 성문법계, 연각, 보살, 그 위의 높은 차원의 마음이
다 숨어 있습니다.
-청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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