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사는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으로 일컫는
조선 세조 때의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그 후손들이 모셔 제사를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玄孫)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뒤 하빈사(河濱祠)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숙종 20년(1694년)
낙빈(洛濱)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3년(186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령으로 낙빈사가 서원(書院)과 함께
철거되었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충효 위인 유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사로 이름을 붙여 사당을 재건하였고, 2003년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