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공노비의 딸로 태어난 아이.
찢어지게 가난해 부모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아직 엄마 품이 필요한 공노비의 딸.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삶이 무엇인지 알지못한다.
상궁인 친척이모를 따라가면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을수 있다며 엄마는 애써
없는 살림에 엄마가 챙겨준 요강,수저,무명이불이 된
보따리를 들고 상궁이모를 따라간 곳은 궁궐이였다.
궁녀가 되기위해 입궁을 하면 가장 먼저 치루게
되는것이 앵무새 처녀 감별법이다.
의녀가 앵무새 피를 여자아이의 팔목에 묻혀
흘러내리지 않고 잘 묻으면 처녀라고 생각해
하지만 잘 묻지않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해 다시 본가로 돌려 보내졌다.
조선의 궁녀는 공노비에서 뽑는것이 원칙이였으나
간혹 일반 백성이나 사노비의 딸들도 입궁했다.
입궁 시기는 대체로 10살 전후였다.
각각 100명 세자궁은 60명 세자빈궁은 40명 세손군 50명
세손빈궁 30명으로 궁녀의 수를 정해놓았다.
대략 500여명 정도의 궁녀가 궐에서 생활했으며
이 수는 왕의 가족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또 궁녀는 자신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처소를 상전으로
모시게된다. 대전의 궁녀는 죽을때까지 왕을 위해
살아야했으며 중궁전의 궁녀가되면 왕비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했다.
제 아무리 임금이라도 다른 처소의 궁녀에 대해서는
관여할수 없었다.
어린 궁녀 즉 생각시들은 선배궁녀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고 어깨너머로 배우는 도제식 교육이나
현장실습을 하며 업무를 익혔다.
교육을 받다가 방귀라도 껴 실수라도 하면 부모에게
연락해 음식을 해와 상전들을 대접하는 벌을 받아야했다.
섣달 그믐이 되면 처음으로 입궁한 생각시들에게
무시무시한 신고식이 기다리고있었다.
새로 입궁한 어린 궁녀들에게 말조심을 강조한 것이였다.
동시에 궁녀들 사이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잡귀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주술적 행사였다.
조선의 어린 생각시는 입궁한지 10여년이 지나면
계례식을 통해 비로소 정식궁녀가 될수 잇었다.
자신을 가르쳐준 상궁이 어머니가 되어 혼례를 올리듯
계례식을 치르고 드디어 비녀를 꽂게된다.
생각시가 계례식을 끝내면 정식 궁녀라는 뜻으로
나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의 궁녀는 나인이 되면 방이 주어지는데
2~3명이 함께 사용했다.
이때 한방을 같이 쓰는 나인들은 상궁이 될때까지
20년 이상을 방 동무로 지내야 했다.
나인이 되면 방청소와 심부름을 하는 하녀도 한명
배정되어 일상적인 일보다 주어진 업무에 전념할수 있게 했다.
조선궁녀들의 근무조건은 보통 8시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격일 근무제로 근무환경이
비교적 좋은 편이였다.
하지만 침실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은 근무시간이 길어
통상 12시간 근무하며 3교대 근무를 했다.
숙직을 한 궁녀들은 날이 밝으면 주간 근무자와
업무교대를 하고 퇴근을 해 24시간 휴식을 취한뒤
주간 근무를 하게 된다.
밤근무를 하는 지밀나인은 상전의 침실을 지켜야하는데
대전의 경우 평균적으로 8명의 지밀궁녀가 왕이 자고
있는 방 주변에서 뜬눈으로 침실을 지켰다.
지밀궁녀의 근무형태, 인원, 근무자등은 국가 최고
기밀사항이라 관료조차 알수없었으며 관심을 가져서도 안됐다.
궁궐에는 궁녀들을 위한 목욕공간이나 화장실 등
편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목욕을 할때면 방에 세숫대야나 나무목욕통을
들여놓고 물을 받아와서 씻었다.
용변도 요강을 이용했다.
격일근무 3교대 근무로 비교적 여가시간이 많은 궁녀들은
놀이나 바느질, 글씨연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담배를 필수있는 자격시험은 선배 상궁 앞에서 담배를 피며
선배 상궁이 그만 할때까지 지치도록 피워야 하는 것이다.
목이 아프거나 담배 연기에 질려 중간에 포기하면
낙방하여 다시는 담배를 필 수 없었다.
이 시험에 통과한 궁녀들에겐 선배 궁녀와 장죽을 문
맞담배질도 허용되었다.
또 품계가 높을 수록 월급은 많아져 정 3품 상궁이 되면
쌀 16말 5되 콩 5되 북어 80마리를 받았다.
게다가 연말이나 명절에 받는 특별 상여금이 있어
높은 수입을 올린 고액 연봉자였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배를 곯아야 하는 공노비나 백성들이
딸을 궁녀로 보내려고 했다.
조선궁녀들의 궐 밖 외출은 비교적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지만
월급을 타면 친정 나들이를 할수있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외출을 하려면 먼저 윗전상궁에게 허락을 받고
또 담당 환관에게 재차 승인을 받아 出이라고 써진
패를 받아야만 궐 밖을 나갈수 있었다.
물론 나들이를 끝내고 돌아오면 이 패를 반납해야했다.
그리고 출입장부에 언제 나가고 언제 돌아왔는지
자세히 기록하여 궁녀들의 대궐밖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 궁녀의 대식사건으로 대표적인 것은
세종의 아들 문종의 두번째 세자빈 폐인봉씨사건이다.
세자빈 봉씨는 자신이 부리던 궁녀 소쌍과 동침을 했다.
이사실이 발각되어 결국 소쌍은 참형을 당하고
세자빈 봉씨는 폐세자빈이 되었다.
이때 세자빈 봉씨는 궁녀 소쌍과 다른 궁녀가 서로
대식하는 장면을 목격해 흉내를 내본것이라 변명을했다.
조선 궁녀들 역시 그 죗값을 참혹하게 다스려도
목숨을 담보로 한 연애사건이 종종 있었다.
연애를 하다 궁녀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를 낳고 100일동안 젖을 물릴수 있는
일반 여성 죄인과는 달리 출산과 동시에 사형에 처했다.
감찰상궁이 궁녀 개개인의 뒷조사를 해 찾아내곤 했다.
조선에서는 궁녀가 왕의 낙점을 받아 잠자리를 하면
하루아침에 정 4품의 벼슬을 받으며 특별상궁, 또는
승은상궁이 되 초고속 승진을 하게된다.
특별상궁이 되면 내명부에 올라 왕과 잠자리를 갖고
후손을 낳는것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만약 후손을 낳으면 바로 후궁으로 승진해 노비에서
왕족으로 신분상승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궐에는 중국에서 온 궁녀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굴씨다.
굴씨는 명나라 마지막 황후인 주황후의 궁녀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주황후가 죽자 청나라 예친왕은
굴씨의 미모에 반해 굴씨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조선으로 보내버렸다.
언어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궁녀라는 공통점으로
조선 궁녀들에게 중국말과 자수를 가르쳐준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궁녀인 굴씨는 늘 고향을 그리워하다
조선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번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 죽어서도 궁궐 귀신이
되어야한다는 궁녀들에게도 예외는 있었다.
제조상궁은 그 자리가 비면 경합으로 선출되는데
선출방식이나 시험이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조상궁이 되기위해서는 온갖 권력이 동원된다.
조선의 궁년들도 재산증식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논과 밭 집등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형식이였다.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상궁으로 일했던 박씨는
자신의 명의로 부동산을 사고 국가에 공증까지 받았다.
그 재산이 최소 만평 이상이였으며 노비까지 부리는 지주가 되었다.
정조실록에는 궁녀들이 기생이나 별감들을 데리고
꽃놀이나 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아무리 힘이 생기고 권력을 잡아도 조선 궁녀들의
운명은 자신이 모시는 왕이나 왕비의 운명에 따라 달라졌다.
모시는 상전이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출궁해 결혼도 하지못하고 오직 상전에 명복을 빌며
외롭게 살아가야 했다.
조선의 궁녀가 죽으면 함께 지내던 동료 궁녀들이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산야에 뿌리거나 절에 모셔졌다.
간혹 후손이 있는 궁녀들은 후손들이 묘를 써 관리하기도 했다.
보모상궁 김씨지묘 서울특별시 은평구 한 야산에 남아있는
김상궁의 묘 역시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 졌지만 손길이 끊긴지 오래다.
500여년의 세월을 조선왕조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조선의 궁녀들. 그녀들은 의복 음식등 다양한 궁중
문화를 우리에게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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