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에서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여인의 사랑
191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1982년 영국 런던에서 죽은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다.
사랑과 일에 대한 그녀의 집념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버그만의 어린 시절은 극도로 외로웠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불씨가 숨어 있었다.
두 살 때 어머니가,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숙부 집에서 자라난 버그만의 타고난 끼는
그녀를 대학이 아닌 스톡홀름 왕립극장 부속 연극학교로 이끈다. 연극학교를 졸업한 그녀가
영화 촬영소에 있는 친구를 찾아간 데서 운명은 바뀐다.
173센티미터의 키에 그리스 시대 조각상같이 완벽한 용모를 지닌 그녀를 보고
감독 한 사람이 말을 건넨 것이다.
“영화에 한번 출연해 볼 생각이 없나?”
“네, 출연하고 싶어요. 어떤 역이든 맡겨 주세요.”
이렇게 하여 그녀는 만 스무 살을 앞둔 1934년에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출연작이 늘수록 그녀의 명성은 스웨덴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간다. 타고난 용모와
폭넓은 연기력에 주목한 것은 할리우드의 유명한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촬영한 영화 <이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녀는 1944년,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때 나이 스물아홉, 세계를 품에 안은 스웨덴 아가씨였다.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결혼, 딸 피아의 출생. 안정기에 막 들어서려던 참에 그녀의
영혼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1945년 가을, 버그만은 뉴욕에서 영화 한 편을 본다.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항운동의
선봉에 선 시민들을 활약상을 그린 신사실주의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차원이 달랐고
버그만은 큰 충격과 감명을 받는다. 1948년 봄에는 같은 감독의 <전화의 저쪽>을 보고 역시
감동에 휩싸인 버그만은 편지를 감독에게 띄운다.
친애하는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쪽>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만일 스웨덴 여배우를 필요로 하신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달려가
선생님과 영화를 같이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저는 영어는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지만
이탈리아어는 티 아모(Ti Amo)밖에 모른답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올림.
티 아모는 영어로 하면 ‘I Love You’이다. 도덕의 완고함이 갑옷의 무게로 짓누르던
그 시대에, 영화 2편을 보고 감독에게 매료되어 사랑을 고백한 그녀의 용기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전화의 저쪽>으로 뉴욕영화비평가상을 받으러 온 로셀리니는 버그만을 찾았고,
두 사람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이탈리아 관광여행에 나서게 된다. 버그만은 원했던 사랑을
얻었으나 남편과 자식, 미국에서 쌓아올린 명성과 재산 등 가진 것 모두를 잃게 된다.
비난 여론이 세계의 모든 언론에서 빗발쳤고, 버그만은 할리우드에서 모은 모든 재산을
남편과 딸에게 넘기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아내가 있던 로셀리니도 이혼을 한다.
이탈리아의 명감독과 스웨덴 출신 여배우는 동거에 들어간다.
‘불륜’이라는 세상의 비난 속에서 두 사람은 합심하여 여섯 편의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만드는 것마다 흥행에 참패하고 평론가들은 비난을 일삼아 두 사람의 사랑에도
금이 가게 된다. 경제적인 파산이 두 사람의 결별을 재촉하는데,
둘 사이에 난 네 아이의 양육이 문제였다.
1956년, 무일푼으로 할리우드에 되돌아온 버그만은 <아나스타샤>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여 두 번째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다. 1958년에는 법정이 두 사람의 결혼이 무효
라고 선고한다. 8년 동안의 사랑이 깨어졌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는다. 연극평론가
라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또 다른 영화에 불굴의 집념을 불태운다.
미모의 얼굴에 주름살이 뒤덮이면 은퇴하는 것이 상례인 할리우드에서 그녀는
이때부터 더욱 일에 매진한다.
1974년 <오리엔트 특급살인>에서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한 뒤에도 <가을 소나타>,
<골다라는 여인> 등에서 노익장을 과시한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의 불굴의 용기에 미국
언론이 비난의 화살을 거두어들인 것은 물론이다. 남자에 대한 사랑이건 일에 대한 사랑
이건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당찬 여인, 그녀의 이름은 잉그리드 버그만이다.
ㅡ졸저 《빠져들다》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의 생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잉그리드 버그만은 두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사진관을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열두 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숙부의 밑에서 자라게 된다. 1933년 스웨덴 왕립 연기학교
(The Royal Dramatic Theater)에 입학해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1934년
<문크브로우 백작>으로 영화계에 데뷔한다. 이 영화로 인해 스웨덴에서 촉망 받는
여배우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그녀는 구스타프 몰란더스의 <인터메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39년 할리우드로 진출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띄게 되어 <아담의 네 아들>, <천국으로 가는 장의사>,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출연하면서 연기 세계의 폭을 넓혀간다.
그리고 1942년 파라마운트 창사 50주년 기념 대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이
될 뻔했지만 그만 중도에 탈락을 하게 되고 같은 해 제작된 <카사블랑카>에 출연을 하게 된다.
<카사블랑카>가 그녀의 출연으로 인해 성공하게 되자 파라마운트는 다시 그녀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캐스팅한다. 게리 쿠퍼와 함께 출연한 이 영화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개선문>에서
이듬해인 1944년 <가스등>으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녀는
게리 쿠퍼와 함께 <여행 가방>에 출연하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에서는
정신과 의사 역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스트롬볼리>에서 함께 작업한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염문으로 배우 생활에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미국 상원으로부터 “할리우드의 명예를 더럽힌 배우”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6년 아나톨레 리트바크 감독의 <아나스타샤>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은 이 작품으로 그녀는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1972년 그녀는 암 선고를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트 특급살인>과
<가을 소나타>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펼쳤고, <오리엔트 특급살인>으로는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에미상 수상식 참여를 끝으로 1982년 8월 29일 자신의
생일 날 친구들과의 생일 파티 후 조용히 숨을 거둔다.
스타로서의 고귀함과 순수함을 갖춘 배우로 평가받는 잉그리드 버그만은 북유럽의
악센트와 화장기 없이도 고혹적인 풍모로 당대의 스크린을 풍미했던 글래머 스타들을 압도
하는 배우였다. 그녀의 우아한 미소와 범접하기 힘든 자태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를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기억하게 한다.
ㅡ인터넷 자료에서
'Hot star'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배우들 (0) | 2020.08.10 |
---|---|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1929∼1982) (0) | 2020.04.10 |
2019년 미스코리아 진(眞) (0) | 2019.12.27 |
포즈도 털털하게`-한효주 (0) | 2019.10.09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21세기의 여성 Top 20 (0) | 2019.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