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山兮要 / 懶翁禪師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는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탐(貪),진(嗔),치(痴) 삼독(三毒)을 소멸 함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법성 (法性)이기에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모두 털어버리고
말없는 청산을 닮고 티 없는 창공 같은 마음으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계를 찾아
물 흐르듯이 거역함이 없는
참 나의 삶을 찾으라는 나옹선사의법문입니다.
懶翁禪師 (1320~1376)
고려 말의 고승.
성장기 스님의 휘는 혜근(慧勤)이요 호는 나옹이며 초명은 원혜(元慧)이다.
속성은 아(牙)씨이고 영해(寧海) 출생이다.
거처하던 방은 강월헌(江月軒)이라하며 현재의 지역은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갈현리이다.20세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에게 득도하였으며,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고려 사찰인 법원사에서 인도승려 지공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처림 (平山處林)과 천암 원장에게서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선(禪)의 영향를 받았다.
고려가 자주국가로서의 면모를 회복하고자 노력할때,
나옹은 중국에 서 선의기개를 떨치고 1358년(공민왕 7)귀국,
1361년 왕의 요청으로 신광사에 머물며 홍건적의 침입때
사찰을 지켰는데, 그 뒤는 광명사와 회암사에 머물렀다.
1371년 왕사가 되어 화암사에 있으면서,
1376년(우왕 2)문수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대혼란이 일자,조정에서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이주하도록 하였
는데,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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