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대한제국에서는 사찰관리서를 설치하여 궁내부에 소속시켜 사찰과 승려의 관리를 맡게 하였다.
일본 불교가 침투하는 시대 사정에서 종래의 불교 탄압 또는 방임정책을 지양하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틀 안에 끌어들여 불교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에 따라 사찰령(寺刹令)을 공포하였는데 그 조직은 대법산(大法山) 중법산을 골간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동대문 밖 성동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총본산격인 대법산으로 지정하였으며 전국의
16개 사찰을 중법산으로 삼아 승직을 임명하였다. 그러니 중법산은 본산 사찰인 셈이다.
여기에 가입한 승려들은 은장(銀章) 무늬가 찍힌 승려증을 발급 받았으며 회비를 납부하였다.
사회불만 세력 끌어들여 친일불교 가속화
이승만정권, 기독교 일변…불교분열 조장
점·사주관상 등 福 비는 행위 ‘이젠 그만’
물질만능 배격…불교적 생활문화 ‘절실’
그런데 정부는 나라가 뒤숭숭한 사정에서 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1904년 폐지되고 말았다.
정부의 불교 개혁의지는 이렇게 좌절하였다.
그런 뒤 친일 불교를 전파하는 방향으로 이용되었다.
1905년 불교 포교의 자유가 보장된 뒤 1906년 봉원사의 이보담 스님과 화계사의 홍월초 스님이
주동하여 원흥사에 불교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최초의 불교 학교인 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봉원사와 화계사는 개화파와 깊숙이 연결된 참여 불교의 요람이지 않은가? 그런데 두 승려는 일본
정토종의 사주를 받아 불교연구회를 조직하였고 정토종을 종지로 삼았다.
이것이 친일 불교의 단초였다.
보담·월초·회광 등 친일승려 극성
따라서 이를 계기로 조선 불교를 일본 정토종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무렵 일본 정토종 승려가 교사로 통도사에 잠입하여 실권을 거머쥐고 통도사를 정토종 말사로
편입하려다가 쫓겨나기도 하였다.
많은 조선 승려들은 정토종에 대한 경계를 높였다.
1907년 불교 대표자 50여명이 원흥사에 모여 총회를 열어 이보담의 불교연구회 회장직과 명진학교
교장직을 사임케 하고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그 후임자로 추대하였다.
이회광은 다음해 다시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어 원종(圓宗)을 창시,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그 자신
이 대종정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이회광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한국불교를 친일 불교로 재편하는 화려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원종의 창시는 수백년 동안 압박 받아온 불교대중에게 “근대화”라는 새 바람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변명이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하나의 도정을 걸었다.
그런데 이회광의 배후에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일진회를 조종하는 무전범지(武田範之)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 원종 창시의 배경은 그리 단순치 않았다.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에 따라 조선통감부가 설치
되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의 교도를 회유하여 황민(皇民)으로 만드는 정책을
썼는데, 1906년 11월에 제정 공포한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에 잘 드러난다.
이토가 종교정책을 펴면서 선교사들과 타협하는 과정에, 승려들을 소외시켜 일방적으로 불교정책을
경정하여 폈고 유사종교에 대해서는 강압정책을 쓰기로 하였다.
따라서 초기에 기독교는 강권에서 벗어난 속에 제한된 통제를 받으며 선교의 자유를 누렸으나 불교는
보호와 예속, 무속과 유사종교는 미신으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불교정책은 일본불교가 침투해 오는 현실에서 일본 불교를 매개로 하여 식민지 정책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었다.
통감부 당국에서도 침투해 오는 일본불교를 방치하면 통제 밖에 놓일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불교를 적당한 선에서 견제하고 조선 승려들을 회유하여 점진적으로 친일화의 길로 끌어
들이려 하였다.
이토는 조선시대 압박을 받아 불만에 차있는 승려들이 좋은 ‘먹이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겉보기로는 불교 포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일본불교는 여러 갈래와 단계를 거쳐 침투해 왔다.
무전범지는 조동종의 승려로 전봉준을 회유하려 들기도 하고 낭인패에 끼어 민비 시해에 앞장서기도
하고 조선통감부의 일급 하수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일합방을 주장한 일진회의 상담역이 되기도 하고 시천교의 고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친일주구 송병준 이용구와 한 무리의 패거리를 만들었다.
더욱이 원종의 고문이 되어 이회광과도 야합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회광이 그의 손에서 놀아났다.
1908년 전국 유명사찰의 주지 48명의 이름으로 불교 개선을 위한 청원서가 내무대신 송병준 앞으로
올려졌다.
거기에 “한국의 승니는 아직도 인권을 가지지 못하고 불교는 여전히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사찰재산의 횡령과 국보의 손실이 날로 심해가고 있다.
금년 4월에 54인의 유지 승려들이 원종종무원을 원흥사에 설립하였지만 내외의 사정에 어둡고 제도
상의 지식이 부족하여 보호를 일본의 조동종 종무원에 요청하여 조동종 관장으로 하여금 통감부에
이첩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이 무렵부터 조동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한편 1909년 여러 승니(僧尼)들이 힘을 합해 모연을 해서 전동(지금의 수송동 일대)에 각황사를
창건하였다. 이 절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된 이후 도성 안에 절을 짓지
못하였는데 이 절이 그 최초를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들어온 승려들은 이 절을 숙소나 휴식처로 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원흥사에 두었던 원종종무원을 이 절로 옮기기도 하였다.
이회광은 조선 불교의 존립을 위해 일본 불교와 연합해야 한다는 뜻에 따라 그 연합의 대상을 무전범지
와 상의한 끝에 조동종으로 결정하였다.
조동종은 정토종이나 정토진종과는 달리 조선의 선종과 맥을 같이하는 계열이라는 것이 그 표면의 이유였다.
그리하여 원종과 조동종의 합병을 기도하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끝내 이회광의 연합 주장이 관철되어 조동종 종무대표인 홍진열삼(弘津悅三)과 연합 조약을 맺었다.
그 연합의 대가로 일본 조동종에서 원종의 인가를 조선총독부로부터 받아내 주는 것이었고 또 조동종에서
고문과 포교사를 파견하여 원종을 지원해주는 것이었다.
이회광은 흡족한 기분으로 귀국하여 전국의 큰 사찰을 돌며 찬성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대등한 연합이라고 얼버무리며 그 자세한 협약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마침 통도사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조선 불교가 임제종을 법통으로 하는 선종을 표방해왔는데 이를 팔아먹었다고 하여 여기저기 비판의
소리가 일어났다. 이것이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논쟁이다.
불교 내부에서 벌인 이 논쟁은 나라가 완전히 병합된 문제보다도 오히려 더 치열하였다.
그 논쟁의 중심 인물은 진진응 박한영 한용운 등이었다.
그리하여 임제종을 창시하여 순천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원종에 맞섰다.
한용운이 임시 관장대리로 일을 보았는데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 승려들의 호응이 있었다.
두 종단은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나 조선총독부는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임제종은 종무원을 범어사로 옮겨 어렵게 일을 보았다.
원종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여러 승려를 일본에 유학 보내는 길을 열었다.
1911년에 조선총독부에서는 새 사찰령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조선 사찰은 모두 조선총독부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았다.
따라서 원종 종무원과 임제종도 폐지되었다.
일본 불교와의 연합 지원 따위의 연결도 끊게 하였다.
사찰령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도첩제보다 더한 ‘악의 법령’이었다.
친일불교는 초기에 불교진흥회라는 이름으로 이회광이 회주가 되고 강대련이 부회주가 되어 이끌어 갔다.
결국 일제 식민지시대에는 총독부의 보호라는 이름의 통제정책에 따라 친일불교가 판을 휩쓰는 상황에서
송만공 박한영 한용운을 주축으로 한 민족불교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만공·석전·만해스님 민족불교 명맥
해방 뒤에는 더욱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승만정권은 불교의 정화를 표방하였으나 궁극으로 불교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승만은 개화기 시기부터 “조선을 문명의 길”로 이끄는 지름길은 기독교적 문화와 제도를 수용해야 한
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야만 근대 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자신이 감리교도가 되어 이를 실천운동으로 벌여 나갔다.
그가 귀국하여 단독 정권을 세운 뒤 불교계의 정화를 지시하였다.
겉으로는 승려들이 장가를 가고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등 타락을 바로잡고 사찰을 청정 비구의 손에 넘겨
주어야 한다 고 표방하였으나 그 속내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불교에 대한 기본 인식은 “미신”이라는 것이었다.
점이나 치고 관상 사주나 보고 복을 비는 저열한 종교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인식의 기반 위에서 “정화”를 지시하였다.
비구들은 이에 동감하여 그 동안 친일불교로부터 푸대접을 받았고 대처승(뒤에 태고종)으로부터 사찰
운영에 소외당해온 불만을 하루아침에 폭발시켰다.
그리하여 “깡패”를 동원하여 강제로 사찰을 빼앗고 사찰 소유권을 확보키 위해 법정에서 싸움질을 벌였다.
한편 대처승들도 팽배한 위기의식에서 이에 질세라 맞받아 대응하였다.
그 결과 불교재산은 “깡패” 동원과 소송비용으로 날아갔다.
그 후유증은 오늘날에도 잔재로 남아있다.
하지만 정화운동은 시대 사정으로 보아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두 종단은 한국 불교의 2대 축의 역할을 한다.
더욱이 정신문화가 황폐하고 물질적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세계 곳곳에서 인종 분쟁, 지역 갈등, 종교
전쟁이 횡행하는 현대에 불교의 평화주의와 평등사상은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특히 허식과 낭비로 일관하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불교적 의례문화와 생활문화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년여 동안 집필해 주신 필자와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