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이화의 다시 쓰는 한국불교사
1860년대부터 중인출신의 유홍기(대치로 통함)는 광교 근처에 약방을 차려놓고 많은 청년들을 불러
불교 강의와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그들 속에 청년 김옥균과 박영효가 들어 있었다.
유대치는 역관인 오경석을 통해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관련의 책을 읽고 지식을 쌓은 뒤에 청년 정치가들을 모아들여 강의와 토론을 벌였다.
특히 김옥균과 박영효는 불교에 심취하였다.
소외된 불교신도 개화파에 편입 의도
평등·자비사상에서 이론적 토대 얻어
왜 선비들이 금기로 삼는 불교에 접근하였을까? 아마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불교의 평등관과 자비사상을 통해 중생제도의 이론적 토대를 얻으려는 것일 것이요,
다른 하나는 여러 모로 소외된 불교 신도를 정치 사회적으로 개화파에 끌어들여 에너지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김옥균과 서재필 등 개화인사들은 서울 주변에 있는 봉원사와 화계사를 자주 찾았다.
그들은 이 절들에서 며칠씩 머물며 예불하기도 하고 참선에 들기도 하고 정진하기도 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어느 때에 화계사에 들렸더니 백담사 무불스님(無不, 속명 탁정식 卓挺埴)이 머물고 있었다.
무불스님은 김옥균과 의사를 통한 뒤에 김옥균의 열성적인 설득 때문인지 개화사상을 갖게 되어 개화
당에 들었다. 또 이동인도 합류하였다.
1880년대 첫 무렵 이동인이라는 스님이 화려하게 등장하였다가 사라진 일은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이
신비에 묻혀있다.
스님은 원래 부산 통도사에 출가하여 살았다가 부산의 범어사와 서울 주변의 봉원사에 옮겨다니며 머물
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부터 서울 주변에 있는 봉원사에 거처를 잡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초기 내력에 대해서는 〈조선개교50년지〉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동인, 무불스님 개화사상 지도 교또에 본부를 둔 본원사는 개항 직후인 1877년 부산에 별원을 두었다.
다음해 11월 초하루 아주 추운 아침에 통도사 스님이라고 말하는 이동인이 별원에 찾아와 오꾸무라 엔싱
(奧村圓心)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말하였다.
오꾸무라가 이동인 스님을 만나보니 30세 전후의 나이로 품위도 있었고 문필에도 능하여 오꾸무라가 그
동안 만나본 다른 승려와 달라 정중히 대해 주었다 한다.
그 뒤 이동인 스님은 여러 번 오꾸무라를 찾아 왔고 어떤 때는 별원에 며칠씩 머물렀다 한다.
그는 항상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불교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이와 같이 교유하면서 반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초여름에 서울에 간다고 말하고는 한 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8월에 이르러 홀연히 서울에서 돌아와
주위 사람들을 멀리하고는 “지금까지 충심을 말하기 꺼렸으나 이제야 시기가 왔으니 제발 나를 도와 달라”고
당부하고 이어 “박영효 김옥균 양씨의 위촉을 받고 일본의 정세 시찰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이럴 때 일본의 태도를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함으로써 조선의 문화개혁에 공헌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달라고 충심으로 설득하였다.(이광린의 〈개화승 이동인〉 참고)
이동인 스님은 이때부터 서울로 올라와서 봉원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유대치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또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일본공사관인 청수관에서 일본 공상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어울려
일본어도 배웠다 한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이동인 스님을 신임하고 일본 밀항의 여비로 2촌이 넘는 금덩이 4개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이를 들고 부산 본원사 분원으로 다시 찾아와 오꾸무라의 동의를 받아 1779년 6월 함께 일본으로 건
너갔다. 이동인 스님은 오꾸무라의 주선으로 동본원사에서 거처를 정하였다.
그는 적어도 9개월쯤 동본원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이름을 일본식인 조야계광(朝野繼光)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한다.
또 서양의 외국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는 “조선의 야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앞의 일본식 개명은 “조선의 야인으로 광영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자신을 조선 야만이라 부른
것은 자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그는 명치 유신 뒤 일본의 사회사정을 살피기도 하고 일본말을 배우고 생활 습관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동인 스님은 본원사의 자금을 차용하였다 한다.
1887년에 이를 조선 정부가 갚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돈을 빌려 공적 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때때로 새로운 제도와 과학 기술 등에 관련되는 책을 구입하였다.
이를 모아 일본인 편에 김옥균에게 보내 주었다.
1880년 3월에는 도꾜로 가서 동본원사의 별원인 천초별원(淺草別院)에 기숙하였다.
이 별원은 예전에 조선 통신사들이 도꾜에 오면 머무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동인 스님은 이곳에서 일본의 후꾸자와와 같은 지식인 또는 정치가를 만나기도 하였고 서양 외교관을
만나기도 하였다.
특히 그곳에서는 흥아회(興亞會)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글자 그대로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사람들이 모여
서양세력의 침투와 아시아의 대응을 놓고 토론을 벌이는 모임이었다.
이때 마침 무불스님이 찾아왔다.
물론 무불스님은 김옥균의 주선으로 이동인 스님을 찾아온 것이다.
무불스님은 이동인 스님의 주선으로 여러 곳을 2개월 동안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이동인 스님은 그 동안 모아둔 책과 자료를 무불스님을 통해 김옥균에게 보냈다.
그 속에는 〈만국사기〉라 부르는 세계사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사진과 만화경(萬華鏡)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물리 화학 생물 등 과학책도 들어 있었다.
1880년 7월에 2차 수신사인 김홍집 일행이 도꾜에 와서 이동인 스님이 머물고 있는 천초별원에 유숙하게
되었다. 김홍집은 김옥균의 주선으로 재야인사인 강위를 서기라는 직함을 주어 동행하였다.
당시 도꾜에 있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김홍집에게 인천 개항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김홍집
은 자기가 관여할 바 아니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하나부사는 별원의 스님인 스즈끼(鈴木惠順)에게 김홍집을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하였고 스즈끼는 이동인
에게 주선을 당부하였다. 이동인 스님은 김홍집을 만나게 되었다.
이동인 스님은 일본 옷을 입고 본원사의 승려로 행세하면서 시와 문장을 논하고 세계 정세와 조선의 장래를
토론하였다. 김홍집은 이동인 스님이 너무나 조선말을 잘하고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 것을 보고 조선 사람일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이동인 스님이 사실을 실토하고 밀항하게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김홍집은 그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감격하였다.
별선군관 활동
…신사유람단 이끌어 김홍집은 청국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은 중국 미국 일본의 연합 또는 후원을 받아야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 〈조선책략〉을 들고 와서 고종에게 바쳤다.
김홍집은 또 이동인을 조정에 추천하였고 이동인 스님은 김홍집이 귀국한 뒤에 돌아왔다.
그는 승려의 신분으로 고종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밀항의 죄를 용서받았다.
그는 자주 임금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 나갔는데 그럴 때마다 궁중 호위병이 마중을 나와 인도하였다 한다.
1881년 2월 군국기무아문이 설치될 적에 별선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전선(銓選, 인재를 뽑는 부서)과 어학
사(語學司, 외국어 관련의 일을 보는 부서)의 참모관이 되었다.
조선시대 승려의 신분으로 실직의 벼슬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이 경우가 처음일 것이다.
이 무렵 〈만국공법〉의 뜻에 따라 그에게 밀서를 들려 한미교섭을 벌이게 하려 도꾜에 보냈다.
서울에서 1880년 9월 유대치 무불스님과 함께 원산 일본영사관으로 가서 여권을 얻어 무불스님과 둘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대치는 이들을 보호하려 동행하였던 것이요,
부산으로 가지 않고 원산으로 간 것은 비밀을 지키려는 것이다.
아무튼 두 승려는 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밀서를 전달하고 그 주선을 약속 받았다.
이동인 스님은 1개월쯤 일본에 머문 뒤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이동인과 무불스님이 일본에 밀파된 사실을 알고 분노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유대치가 이들을 보호하려 다시 부산으로 와서 마중하였고 이동인 스님은 동래부로 찾아가
서울로 가는 교자를 준비해달고 부탁하였다.
일본언론, 스님 행적에 촉각
더욱이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한 것도 그의 의견에 따른 것이며 그는 신사유람단의 총포와
전선 구입의 특수 임무를 띤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신사유람단의 대표는 이원회였는데 그의 수행원 송헌빈이 〈동경일기〉를 써서 그 시찰 과정을 밝혔다.
이 책에 시찰단을 12개조로 구성하고 한 조의 수행원과 그 하인들의 이름을 밝히면서 이동인 스님의
이름을 빼고 있다. 그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등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동인의 참모관 임명을 두고 숱한 논란이 벌어졌다.
뒷날 유림 척사파들이 이동인을 참모관으로 발탁한 사실을 두고 “중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케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김홍집은 자신이 추천하지 않았음은 임금과 조정에서 다 안다고 변명한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이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화파를 이끈 김옥균이나 통리기무아문의 군무사(軍務司) 당상을 맡고 있던 민영익이 추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조정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는 이동인 스님을 후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을 지키려 정식 명단에서 이름을 뺐을 것이며 일행과 달리 뒤늦게 출발하게 하였다.
아무튼 유람단은 소그룹으로 나누어 여러 곳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청국 공사관에 들러 하여장이나 황준헌과 같은 외교관들과 대담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유람단의 일정을 신문에 보도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화방문서〉(花房文書)에는, 일본 공사인 하나부사가 외무대신인 이노우에(井上馨)에게 보고하면
서, 신사 유람단이 출발할 즈음에 이동인 스님이 갑자기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에 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누구의 기록이 맞는지 앞으로 규명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