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공자의 일생
1. 상갓집 개, 만세의 사표가 되다
▲ 작자 미상, ‘공자사구상’, 106×66㎝,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공자가 정나라로 가던 길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제자들과 떨어져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홀로 동쪽 성문 밖에 서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자공(제자)에게 말했다.
“동문 밖에 한 사람이 서 있는데 키는 아홉 자 여섯 치나 되고 하수(河水)와
같이 길게 찢어진 눈에 이마는 높고 넓었으며, 그 머리는 요(堯)임금 같고,
목은 고요(皐陶) 같았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습니다.
허리 아래는 우(禹)임금보다 세 치가 짧았는데 풀이 죽어 기가 꺾인
모습이 마치 상갓집 개와 같더군요.”
자공이 이를 공자에게 고하자 공자는 흔연히 감탄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그린 내 모습이 꼭 맞다고는 할 수 없으나 상갓집 개와 같다고 한
것은 맞다! 맞아!”
주유열국(周遊列國)하고 있는 공자의 딱한 처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기원전 492년. 공자의 나이 60 때 일이었다.
비천한 집안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한(漢)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서 공자가 기원전 551년 9월에
출생하여 기원전 479년 4월에 죽었다고 적었다. 춘추(春秋)시대 사람이다.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귀족이었지만 공자의 아버지대에 이르러서는 낮은 무사
계급으로 전락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부인 안징재와 혼인할 때 그의
나이가 66세였다.
스무 살이 되지 않은 안씨 부인과 50세 가까이 나이 차가 났다. 그래서 사마천은
두 사람의 결혼을 ‘야합(野合)’이라 애매하게 표현했다.
정식 혼인을 하지 않고 남녀가 결합했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많은
것은 안징재가 숙량흘의 세 번째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숙량흘은 첫 번째 부인과 혼인하여 딸만 아홉을 낳았다. 첩을 들여 아들을
얻었는데 다리가 불구였다.
공자의 어머니를 만나고서야 원하는 아들을 얻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공자가 세 살 때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데리고 추읍을 떠나 노나라의 도읍인 곡부(曲阜) 성
안의 궐리(闕里)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공자는 본가와 인연이 끊어진 듯하다.
공자가 17세 때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어머니를 부친의 묘에 합장하고자
했으나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는 내용이 나온다. 모친이 사망한 후 공자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훗날 공자가 ‘내가 어렸을 때는 집안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험한 일을 했었다’고
회상한 것만 봐도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출신성분으로 따진다면 공자는
결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핸디캡이 많은 사람이다.
공자는 19세에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50세를 전후해 큰 벼슬을 하기까지 행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창고의 출납을 관장하거나 가축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을 했을 뿐이다. ‘논어’에는
공자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간략하게 정리한 문장이 전한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스스로 섰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의혹되지 않았다. 쉰 살에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귀에 들어오는 소리에
마음이 거슬리지 않았고, 일흔 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자는 51세부터 55세까지 대략 4년 동안 중도재(中都宰)를 거쳐 대사구
(大司寇·경찰청장)를 지냈다.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의 공자 초상화는 대사구 시절 모습이다. 대사구 시절은 짧았다.
그는 노나라에서 더 이상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없는 것을 알고 긴 유랑길에 올랐다.
유랑은 14년 동안이나 계속됐지만 그를 환영하는 군주는 만나지 못했다.
68세가 되어 고국인 노나라로 되돌아왔다. 귀국 후에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은 접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고문헌을 정리하는 데 전념하다 73세를 일기로 긴 일생을 마쳤다.
존공도 비공도 아닌 인간 공자
공자는 비천한 집안에서 어렵게 살았다.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받아줄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공자는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 자’라고
평가받은 것처럼 생전에는 현세적인 성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역사 속에서 만세의 사표가 되고 성인(聖人)으로 추대됐다.
공자가 유가(儒家)의 스승을 넘어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필요성이
개입됐기 때문이다.
공자를 가장 먼저 성역화의 대상으로 점찍은 건 한(漢·기원전 206~기원후 220)왕조였다.
유방이 세운 한왕조는 통치를 위해 유학이 필요했다. 한에 앞선 중국의 첫 통일왕조 진의
시황은 강력한 법치(법가사상)를 정치이념으로 했으나 가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의 지도자는 새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사람들의 성정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인성교육을 찾았다. 이때 주목받은 것이 공자였다.
한 무제(武帝) 때 학자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98~106)에 의해 공자는 ‘소왕(素王)’으로
격상됐다. 전한(前漢) 마지막 황제 평제(平帝·기원후 1~5)는 공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
이라는 시호를 내려 제후 반열에 올려놓았다.
당 현종(玄宗·960~1279)은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왕의 시호를 내렸고, 송 진종
(眞宗·998~1012)은 현성문선왕(玄聖文宣王)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이로써 작은 나라의 평범한 스승 공자는 ‘왕위는 없지만 임금으로서의 덕을 갖춘
소왕’으로 눈부시게 부활했다.
모든 시대에 공자가 한결같이 존경받은 것은 아니다. 공자는 권력자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때로는 존공(尊公)이 되기도 하고 비공(批孔)이 되기도 하는 등 극단적 평가를 받았다.
‘존공’은 한(漢)대부터 시작되어 청(淸)대까지 봉건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틀이 됐다.
‘비공’은 태평천국(太平天國·1851~1864)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1898~1976)이
신도들을 모으는 방편으로 이용됐다.
근대에 와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 장칭(江靑)을 위시한 사인방(四人幇)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축출하기 위해 ‘비공’을 선택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공자의 가르침이
마르크시즘을 대체할 이념으로 인식되어 새롭게 공자 열풍이 일고 있다.
열풍이 아니라 거의 광풍에 가깝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우리가 공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런 정치적 계산 때문이 아니다.
그럼 지금 이 시점에서 왜 다시 공자인가. 이 물음에서 이번 연재가 시작됐다.
공자의 일생을 그린 ‘공자성적도’
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들여다봐야 한다.
아무리 매끈한 언어로 많은 사람을 현혹해도 말하는 사람의 생애가 명료하지 않으면
말짱 다 거짓이다. 사람의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돼 있다.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구호는 공허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실천한 사람이다.
공자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문헌자료는 의외로 많이 남아 있다. ‘대학’ ‘중용’
‘맹자’ ‘논어’를 비롯해 ‘공자가어’ ‘순자’ ‘장자’ 등 동양 고전이라 일컫는 책에는
모두 공자의 자취가 짙게 묻어 있다.
이번 연재는 기존의 접근법과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를
중심으로 공자를 살펴 볼 예정이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일생에서 기념할 만한 사건이나 이야기를 그림을 곁들여 도해한
일종의 ‘공자평생도(孔子平生圖)’다. 적게는 10편에서 많게는 100편이 넘는 그림으로
이뤄져 있어 시각적으로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번 연재는 ‘공자평생도’가 중심이 되겠지만 이밖에도 중국의 고개지(顧愷之·345~406년경),
염립본(閻立本·601~673), 오도자(吳道子·700?~760?), 구영(仇英·약1509~1551)의
작품을 비롯해 조선에서 간행된 여러 판본의 판화집과 필사본을 아울러 참고할 계획이다.
긴 연재를 통해 공자가 훈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준 스승이었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독자님들의 많은 격려와 질책을 부탁드린다
2. 선성소상 - ‘호학자’(好学者) 공자가 사랑한 제자 안회
▲ ‘선성소상’, 작자 미상, 1904년, 목판에 채색, 27.6×37.8cm. 장서각
어느 날 안회가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아갈 것이다. 인을 행하는 방법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어찌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안회가 다시 세부적인 항목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非禮勿動).”
그러자 안회가 대답했다.
“제가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이 말씀을 받들겠습니다(回雖不敏, 請事斯語矣).”
‘논어’의 ‘안연’ 편에 나오는 내용이다. 워낙 유명한 문장이라 중학교 한문 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구절은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가 아니다.
안회의 대답이다.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스승의 뜻에 따르겠다는 한마디에 옛사람 안회의 사람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초상화는 여러 가지 형식이 전한다. 공자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모습(行敎圖).
제자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모습(憑几像). 큰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乘輅像).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聖像). 사구라는 벼슬을 할 때의 모습(司寇像). 면류관을 쓴 정면상
(大成至聖文宣王之像)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의 처음 부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모습이 공자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는 ‘행교도’다. ‘행교도’는 공자가 홀로 서 있을 때도 있지만 공자 뒤에
젊은 제자가 한 명 서 있는 모습이 더 자주 등장한다.
그 제자가 안회(顔回)다.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받자 “총명하지는 못하지만 스승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던 그 사람이다. ‘선성소상(先聖小像·옛 성인의 작은 초상)’은 수많은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교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서 공자의 제자가 총 3000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공자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누구든지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속수(束脩)’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속수’는 육포 열 가닥을 묶은 것으로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수 있는
선물이었다. 그 전통이 남아 조선시대 때 성균관, 향교, 서당 등에서 입학식 때 학생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예절을 ‘속수례’라고 했다.
3000명의 제자 중에서 공자가 인가한 수제자는 모두 77명이었다.
‘중니제자열전’에는 “내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서 학문에 능통한 자가 77명 있는데
그들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그 많은 제자 중에서 안회는 항상 공자의 바로 뒷자리에 위치해 있다.
공자뿐 아니라 후대의 유가(儒家)들까지도 안회를 ‘수제자’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안회는 ‘논어’에 21회 등장한다. 등장 횟수로는 자로(子路·42회)와 자공(子貢·38회)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회는 두 사람을 제치고 공자의 ‘수제자’로 발탁되었다.
안회는 가난했다. 가난했으나 그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한 통의 대나무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공자는 안회가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빌 정도’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안회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줄만
알았지 반박할 줄 모르는 안회를 보고 공자마저 제자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그가 물러간 뒤 홀로 지내는 것을 살펴보니 스승의 가르침대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안회가 스승에게 배워서 실천한 가르침은 ‘인(仁)’이었다.
공자는 ‘안회가 석 달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일 뿐’
이라고 평가했다.
공자는 안회의 실천력을 보고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그가 멈춘 것을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그런 실천력은 자공은 물론 공자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덕목이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스승을 스승 되게 만드는 사람은 제자다. 공자는 완전한 믿음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를 보며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안회는 공자가 약해질 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한번은 공자가 주유열국
하는 도중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길이 막혀 칠 일 동안 굶은 적이 있었다.
상심한 공자가 탄식하면서 자신의 도가 그릇된 것인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안회는 단호한 어조로,
스승님의 도가 너무 커서 천하가 그 도를 수용하지 못할 뿐이라고 위로했다.
안회가 공자를 절대적인 믿음으로 공경했다면 공자는 안회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했다.
안회가 곁에 없으면 크게 걱정했다. 공자가 광(匡) 땅에서 갇히게 되었는데 안회가 뒤처졌다.
걱정이 된 공자가 안회를 보고 반가워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고 말하자 안회는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자신의 법도를
이어받을 사람이 안회라고 생각했다.
이런 안회가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마흔이 안 된 나이였다.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크게 상심했다. 공자가 곡을 하며 상심이 깊어지자
모시고 있던 사람이 걱정을 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다.
“그를 위해 상심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
공자가 안회를 편애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제자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명문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공자 스스로가 밝힌 공자 자신은 “열 가구가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성실과 믿음이 나와 같은 자가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듯이 대단한 호학자(好學者)였다.
안회는 공자의 호학하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공자는 애공(哀公·노나라 군주)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배우기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목숨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자가 없으니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을 듣지 못했습니다.”
혼란한 시절에 칼과 창이 아닌 예와 인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사상은
당시 모든 군주들에게 외면받았다. 그런데 안회는 스승의 가르침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 실천했다. 시대가 흐르면서 안회의 믿음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공자는 안회 같은 순정한 제자가 있어 자신의 사상을 견고하게 전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선성소상’에는 유가의 학맥뿐만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역사가 담겨 있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귀한 모습이다.
3. 야합·니산치도 - 공자,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
▲ ‘야합’ 작자 미상, 사천성 성도 신룡향 출토 한나라 화상전
밝은 대낮에 두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다. 문 닫힌 방 안이 아니라 야외의 우거진 나무 아래서다.
차분하게 준비한 만남인 듯 벗은 옷은 가지런히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다.
뜨거운 피가 끓는 두 남녀는 이내 한 몸처럼 뒤엉켰다.
바구니를 내팽개친 여인은 누운 채 두 다리를 벌려 남자의 어깨에 걸쳤다.
무릎 꿇은 남자는 발기된 성기를 여인에게 삽입하기 직전이다.
은밀해야 할 장소에는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남자 뒤에서 키 작은 남자가 두 손으로 성교하는 남자의 엉덩이를 밀고 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남자가 서있다. 키 작은 남자나 서 있는 남자나 모두 발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고 원숭이 두 마리가
꽥꽥거려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주위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사천성 성도에서 출토된 한(漢)나라 때 화상전(畵像塼)의 모습으로
그림의 제목은 ‘야합(野合)’이다.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리거나 서로
정을 통하는 행위’를 야합이라 한다.
성스러운 성인(聖人) 공자의 탄생과 관련해 ‘야합’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낸 이유는 이
문제가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야합’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저서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서 공자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했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이라고 한다.
방숙이 백하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 딸과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으니, 니구(尼丘)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은 것이다.
노나라 양공 22년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머리 정수리가 낮고 사방이 높아 이로 인해 이름을 구(丘)라 했다.
그의 자는 중니(仲尼)고 성은 공씨(孔氏)다.’
사마천은 위대한 성인 공자의 탄생을 ‘야합’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로 표현하면서
일체의 설명을 생략했다.
그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갖가지 추측과 항변으로 공자의 탄생에 대한 설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야합’은 문자 그대로 ‘야합’일 뿐이다. ‘야외(野)에서 결합(合)한다’는 뜻이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의 ‘야합’은 지금처럼 그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의적이고 생산적인 의미가 더 강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가뭄이나 홍수를 막기 위해 남녀가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연애와 성행위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나무는 주술적인 제의가 이루어지는 사당과 비슷한 신성성을 지닌다.
즉 남자(양)와 여자(음)의 결합이 천지의 교감을 얻어 비를 내리게 하고 홍수를 멈추게 한다고 믿었다.
신령스러운 나무 아래서 성스러운 행위를 하는 것이 제지되기보다는 오히려 장려되었다.
그래서 강물의 얼음이 풀리는 ‘중춘 때에는 남녀들이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는데 이때에는 남녀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않았다’고 ‘주례’의 ‘지관, 매씨’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 풍습이 사마천(BC 145년~BC 85년경)이 살던 한(漢)대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성스러운 분의 탄생을 언급하면서 ‘야합’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쓴 것은
결코 공자를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쓰는 ‘정치적 야합’이니 ‘담합’이니 할 때의 부정적인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면 ‘숙량흘이 안씨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는 사마천의 문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공자가어’의 변명이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진다.
즉 ‘공자의 부모가 나이 차가 많이 나 정식으로 혼인을 치르지 못하고 절차도
제대로 다 밟지 못한 것으로 믿고 싶어한’ 강박관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림으로 읽는 공자의 생애를 기록한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는
‘행교도’ 다음으로 ‘니산치도’가 실려 있다.
‘니산치도(尼山致禱·니구산에서 기도하다)’를 살펴보자.
곱게 단장한 여인이 신령스러운 산 앞에 서 있다.
산봉우리에는 흰 구름이 하강하듯 걸려 있다.
여인은 향을 피우려는지 탁자 위에 놓인 향로에 손을 내민다.
그녀 뒤로 시중드는 여인과 쌍상투(雙髻)를 한 동자 두 명이 합장한 채 서 있다.
언덕 곁에는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무와 꽃들이 조심스럽게 피어 있다.
공교롭게도 그림 속의 계절도 봄이다.
만물이 생명을 향해 피어나는 봄날,
여인은 자신에게도 새로운 생명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한다.
여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붉은색 탁자다. 시중드는 여인이 들고 있는 제기도 붉은 천에 받쳤다.
화가가 굳이 중요하지도 않은 받침대를 가장 중요한 듯 붉은색으로 칠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붉은색이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었다.
궁전과 사당에 유난히 붉은색을 많이 쓰는 이유도 그런 목적 때문이다.
여인이 서 있는 곳은 사당이나 궁궐이 아니다. 귀족의 집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산 밑이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이곳이 사당만큼 신성한 장소다. ‘만세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아들로 점지해달라고 기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표상은 탁자뿐만이 아니다.
구름과 아이들도 특별하다.
구름은 여기가 꼭 높은 곳에 위치한 장소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대 회화에서 구름은 상서로움의 표현이다. 구름은 봉황과 기린, 사슴과 학처럼 하늘이 그
존재를 축복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할 때 등장한다.
쌍상투를 한 아이들도 치밀한 계산에서 그려 넣은 것이다. 동자들은 기도하는 여인의
하인으로 따라온 것이 아니다. 신선계에 사는 선동(仙童)이다.
쌍상투를 한 선동은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도(壽星圖)’나 자손번창을 기원하는 ‘백자도(百子圖)’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런 기원과 축복으로 성인 공자가 탄생했다. 그림 위쪽 빈 공간에는 ‘니산치도’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주나라 영왕 19년, 노나라 양공 20년에 성모 안씨는 노나라 니구산에서 기도했다.
이듬해에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의 정수리 부분이 움푹 파인 것이 니구산과
닮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름을 구(丘)라 하고 자(字)를 중니(仲尼)라 했다.’(周靈王之十九年,
實魯襄公之二十年, 是年聖母顔氏禱於魯尼丘山, 明年乃生孔子, 旣生首上圩頂象尼丘, 因名丘, 字仲尼)
니구산은 산동성 곡부현 동남쪽에 있다. 원래는 니구산인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기 때문에
피휘(避諱)하여 ‘니산(尼山)’이라 불렀다. 주 영왕 19년은 BC 553년이다.
공자가 탄생한 해가 주 영왕 21년 BC 551년이니까 안징재가 니구산에서 기도한 지 2년 만에
공자를 낳았다. 오랜 기도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귀한 아들은 귀하게 자라지 못하고 어렵게 자랐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어 ‘방산’이라는
곳에 매장했는데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에게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지 않았다.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합’으로 얻은 아들에게 떳떳하게 남편의 존재를 알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야합’이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였다 해도 야합은 야합이었다.
평범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는 뜻이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의 삶이 어떠했을지 상상하는 것만
으로도 충분히 고달프다. 공자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다
[출처] : 조정육 : 그림으로읽는 공자/ 주간 조선, 22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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