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에 있는 이 원림은 목조기와집과
주위 경관을 그대로 살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민간정원으로 담양 소쇄원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곳이 있다. 우선 이 정원을 보고 있노라면 차분하고
선인들의 소박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적당하게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수목이
잘 배치되어 있고 초화들의 꽃들이 피어서 시선을 머물게 만든다.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인 나주 오씨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 선조 16∼1623 인조 1)가
처가마을에서 행정(杏亭). 망재(忘齋)라는 소재(小齋)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살았던 초당이었다.
여기서 망(忘)은 단절되다(斷切.斷截)의 뜻으로 명곡이 광해군 치하(1608-1622)의 어지러운
세상일을 개탄한다. 단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모친상을 당한 후 10여년간 비어 있었고 네째아들 장계(藏溪) 오이정(吳以井 1619~1655
자 명중 明仲)이 인조반정 후 아버지 오희도가 과거에 급제 정철의 막내이자 4남인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1582~1650)의 추천으로 한림이 되기전 한양에 가기전 까지 지냈던 곳으로
그 자리에 오이정이 1639년 사마양과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중앙 벼슬의 한계에 느끼고
낙향해 별서로 다시 꾸미게 되면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망재(忘齋)와 명옥헌(鳴玉軒)의 사연을 시로 엮어보는 기회를 갖어본다.
학문을 닦던 기암은 어느날 서울로 가는 제자 오희도를 보내는 마음을 시에 담는다.
들으니 그대가 말을 채찍질하여 서울을 출발 한다는데/가는길 험악하여 고통이 많을거야
늙어가니 세상위해 봉사할 힘없고/나그네 살이가 집에서 가난한 삶과 어찌같아
구름 뿌리는듯한 술구더기는 설음인해 향기롭고 /눈을 씹은듯한 쟁반에 채소는 봄부터 가늘
어졌어 이제까지 피곤한 모습 머리돌려 생각하니/어수선한 일에 헛되이 메인몸 가엽기만 하구나
행정(杏亭)-망재(忘齋)-도장정(道藏亭)-명옥헌(鳴玉軒)으로
정자를 지은 장소중에 명옥헌은 강이나 계곡에 있는 정자형 (江溪沿邊形)과 못에 세운
정자형(池邊形)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 강이나 계곡 등에 가까이 위치한 정자의 형태에
이 물을 끌어 자연적인 못이나 인공적인 연못에 설정되는 정자이다.
이런 정자는 못의 한쪽가나 중앙에 세워 물과 주변의 공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배치한다. 정자 좌측에 흐르는 계곡물을 유입시켜 인공못에 거두고 차면 넘쳐 흘러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오이정은 백일홍(현재 수령 300∼400년)과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은둔하면서
도장곡(道藏谷)에 적송을 심고, 계류를 이용한 위 연못과 아래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 진입부-연못주변-누각주변-상지위의 공간 등으로
구성하고 그의 호를 따 도장정(道藏亭)이란 이름에서 비롯되며 지금은 명옥헌(鳴玉軒)
이라고 정한 것이다.
또한 명옥헌 뒤에는 아버지와 학문을 나누었던 이 지방의 이름난 양산보(梁山甫),
오희도(吳希道), 김인후, 정철 등의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가 남아
있어 이곳을 도장정(道藏亭)이라고 불렀으며 그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됨에
우암 송시열의 제자 오기석(吳棋錫1651~1702)을 아끼는 마음에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짓고 계곡바위에 새겼다. 또 오기석의 손자 후손 현감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이
다시 중수하여 명곡의 뜻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옥헌(鳴玉軒)이란 이름은 ‘한천의 흐르는 물소리가 옥이 부서지는 소리 같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명옥헌 건물은 정면을 북쪽으로 자리잡았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아담한 정자이다. 명옥헌기와 정인명(鄭引溟)의 재영시와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鳴玉軒癸丑)’과 정내 삼고(三顧)라는 작은 편액이
눈길을 붙잡는다.
삼고(三顧)는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를 세 번 찾은 뜻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서
유래한 말로 오희도와 능양군(훗날 인조)으로부터 삼고의 예를 받았다는 뜻의 대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현판은 한일합병의 울분을 못이겨 순절한 절인 심석(心石) 송병순
(宋秉珣, 1839~1912)이 썼다.주련은 다른정자와 다르게 두줄로 쓰여져 있었다.
百川逝意 慾歸海 萬樹生心畢境花 모든 냇물이 대체로 흘러가는 것은 바다에 돌아
가고자 함이며 /모든 나무가 의지를 기르고 있는 것은 필경 꽃 피우고자 함이로다.
노자의 유수(流水)의 순리정신에 베어나 있다. 특히한 것은 좌측 맨 처음에 있는
주련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하고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순국한 영원한 영웅 안중근의사(安重根義士)를 추모한 중국 청나라의 위안스카이
(袁世凱)가 쓴 애도(哀悼)를 뜻하는 만시(挽詩)라고 알려지고 있어 눈길을 붙잡는다.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平生營事至今畢 死地回生非丈夫
몸은 비록 한국인이지만 그 이름 만국에 떨쳤도다/살아 백년 없지만 죽어 천년 빛낼것이다.
평생 도모한 일 이제야 이루었구다/죽어서 살아 돌아왔으니 그 아니 장부이던가
측면에 주련에는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를 느끼게 하는 명언이 써
있어 더운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한다.
때가되면 천지는 스스로 제자리를 잡는데 /운이 가버린 영웅은 홀로 도모하기 어렵고,
산과들의 초목은 해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푸르되 /사람은 능력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산객이 되면 돌아오기 어렵다.
時來天地皆回力 運去英雄不自謀 山野草木年年綠 世民英雄歸不歸
이후 인조가 재임 중 창평(현 고서면 후산리)에 은거하고 있는 선생을 찾아 왔을 때
말을 매었다는 키가 30m에 달하는 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가 하마비의 역할을
했다하여 계마행수(仁祖大王 繫馬行樹)라 고 부르고 있다.
그것을 들은 능양군 광해군을 폐위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던 중 오희도를
찾아 정사를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떠날 수 가 없으며 부족한 지식으로 세상에
뜻을 펼 수 없어 아직 학문에 더 깊이 매진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본심을 오희도의 심정을 담은 시에서 시에서 엿 볼수 있다.
옛것을 좋아하니 태어난 것이 지나치게 늦었고/명예를 구(求)하였건만 늙으면 곧바로
쉬어야지 시대가 위태로울수록 백옥(白屋)이 편안하고 /세월이 편안하니 물가가 생각나네
삼가함 없이 이몸 어디로 갈건인가/오래도록 병세가 치료되지도 않았는데
일평생(一平生) 큰 뜻을 품었건만 /저물어간 길목에서 홀로 망설이는구나.
그는 후진양성에 힘쓰다 41세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이때 망재에서 지낸시가 명곡유고에 전하고 있다.
오희도는 망재에서 밤을 새며 읊기를 "고요히 홀로 거처할때 더욱 삼가해야 해
/귀신의 눈이 번개 같다고 했으니까"하며 처신을 경계했다. 그는 이곳에서 외로움을
나타내는 감정을 시로 읊는다.
구름을 보니 해 이미 저버렸고/달을 기다리니 밤은 벌써 깊었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어지려워 사람의 마음 시름하게 하는구나.
看雲日己沒 待月夜先深 何來 一聲笛 ㅇ殺愁人心
또 오희도가 머물며 지었던 시를 감상해 보면
머뭇거리는 발자취 본래 의지할 곳 없으니/바린 행장이야 수풀 속에 의지할 뿐.
티끌같은 잡념마저 물 따라 흘러 갔고/신선의 지팡이는 흰 구름만 좇나니
누추한 몸아나마 항상 옛 그대로지만/온갖 산에 올랐으니 도(道) 기운 충만하네.
이 세상 어찌골몰만 하겠는가/이해 저물면 함께 가자 기약하네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 추담 이성담과 정철의 아들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 1592∼1650)와
1583∼1659), 이괄의 난과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남원 출신 폄재(砭齋) 최온
(崔薀1583 ~ 1659), 의병장으로 전라도 남아를 의리의 사나이라는 계기가 됐던 경명(高敬命)의
아들 청사(晴沙) 고용후(高用厚 1577-1648),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강항(姜沆 1567~ 1618).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유사(柳泗)의 손자였던 송암(松庵) 유평(柳玶 1577년
(선조 10)∼미상) 등과 근친하며 교류했다. 유평이 그에게 보낸 시에서는
보슬비 처음개인 강위 산자락에/봄빛 다툰 매화와 버들 가벼운 추위를 깔보아
멀리서 생각하니 숲아래 사는 그대여/화창한 봄빛을 누구와 함께 보려는가
小雨初晴江上山爭春梅柳ㅇ寒遙想幽捿林下客滿園春色共誰看
그리고 명옥헌의 처음 정명인 망재에서 망(忘)자라 하는 이유에 대해 시를 읊는다.
망(忘)자를 새긴것이 어찌 다만 세상 번잡만 잊을건가/마음과 형제 모두를 잊어야 해.
한방중 차가운 창문 등불 밝은 곳에서/누구가 알랴 잊은 가운데 잊지 못할것이 있다는
것을 청사가 어느날 그를 방문하기에 명곡은 막걸리와 산 과실로 정담을 나눴
다고 명곡유고에서 전하고 있다.
곤궁한 신세 흉금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문 닫힌 고독한 마을에 낙엽만
차곡차곡 이다지도 다행하게 그대 먼길 찾아주니 /막걸리 산 과실로 오손도손
정을 나누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의 포로가 되었던 강항의 기록을 모은 간양](看羊錄)을
남긴 영광출신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년 ~ 1618)은 상사 오득원(吳得原
오희도의 자) 에게 시를 적어 보내기를
응전(膺鸇매제리)은 봉황처럼 드물지 않은 것이니/덮치는 것이 그 어찌 덕화(德化)의
빛을 봄만하랴 낭묘(廊廟)의 재기(材器)를 잘 감추어 두게나/세상엔 간 곳마다 위기가
많으니까 저서로는 명곡유고(明谷遺稿)가 남아있다.
그의 아들 오이정도 성균관에 입학하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하고 37세로 요절한다.
명옥헌 정자가 몇안되는 북향을 향하고 있는 것을 임금을 향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남향을 고집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 향군일심이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주변 정원은 입구의 낮은 부분인 지당부와 중간 부분인 정사부, 그리고 정자
뒷부분인 계류역(溪流域)과 방지부(方池部)의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세상이 네모지다고
여긴 선조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동남쪽 비탈면에 조성된 상지는
6x11m 규모의 방지로 계류에 인접되어 있다.
못 안에는 높이 1.3m, 지름 4.7m의 바위가 수중암도(水中岩島)를 이루고
있는데 호봉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섬을 돌게 하고 계류로 떨어지게
한 후 다시 하류로 진입시키는 구조이다.
그중 한 바위에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하지(下池) 연못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20x40m의 장방형으로 쌓아놓은 둥근섬을
설치한 지당정(池塘庭)을 도입했다. 지당 주변은 수많은 중국원산종인 자미나무를
주제로 하여 줄지어 심었는데 마치 도잠(陶潛)의 무릉도원경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는 자연경관과 함께 주위의 수목과 정자가 연못에 투영되어 못 속에 담긴
아름다운 영경(影景)을 볼 수 있다.
누마루에서 앞 연못이 있어 마치 물위에 떠있는 착각을 하게 되고 또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우월성마저 느끼게 하여 정자는 이들에게는 인고하는
수양의 공간의 역활을 했다.
오희도가 절제된 감정으로 읊은 시에서 엿볼 수 있다.
나에게 이 망재가 있으니 나의 문정(門亭)이라고 하기 마땅하다.
이 망재를 거처하면서 세상을 잊고 다시 형제까지 잊었다네.
세상을 잊었는데 나라에 출세를 잊지 않을 것인가.
형제를 잊었는데 마음까지 잊지 않을손가.
마음속에 무엇이 있겠는가 일생동안 싸움터에 나간 것처럼 조심하여라.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이 흘렸던 그 많은 감성어린 시어들은 어디 갔을까?
조선조 후기와 어두운 일제 강점기를 살면서 산야에 묻혀 산 선비 담은
(澹隱) 조병진(曺秉鎭 : 1877∼1945)이 어느날 이곳에 송영백과 함께
명옥원림을 찾아 읊은 시가 담은시집(澹隱詩集)에 전하고 있다.
후산은 외론 정자 감싸고 /원림 백일홍 오래 붉구나.
석양 빨갛게 비쳐 내리고 /연못 푸르게 떠 오르구나.
后山孤院抱 苑谷百紅長 暮日下映赤 晩塘上泛蒼
둘레엔 수초 절로 자라고 /맑고 맑은 물 하늘빛 담네.
이곳 세상과 친하지 않아 /바람 구름만 홀로 노닌다
邊圍然草茂 滄浪納霄光 此所無親世 風雲遊獨當
담양군 창평 IC 에서 요금 정산 후 우측 방향으로 계속 간 후 좌측의
팻말을 보고 마을 길로 들어가면 명옥헌원림 이정표가 있다.
(자료문헌=명곡유고(明谷遺稿).1998 담양문화원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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