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亭子기행] 풍암정(楓岩亭)

선바우1 2019. 1. 15. 14:06



가을이면 서리맞은 고운 단풍이 물 위를

비추어 물빛이 단풍빛이고 단풍빛이 물빛....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금곡마을 윗쪽 한 원효계곡(元曉溪谷) 하류에는

칠년대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으면서도 산수가 수려한 정자가 하나있다.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비포장도로로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풍암정이 자리를 잡고 있다. 주위에 수풀은 원시림을 방불케

자연적으로 우거져 있다. 비스듬히 누운 적송의 자태는 작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할 만큼 멋스럽다.

이곳이 조선중기의 우리의 한 선비가 기거했던 곳 풍암정(楓岩亭)이란

곳이다.  과거를 급제한 삼형제가 임진왜란 전쟁이라는 환란속에서 선비들의

한서린 애환이 파묻히게 된 곳이다.


풍암정(亭)의 주인인 김덕보(金德普 1571 선조 4 ~ 1627 인조 5)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에 살았다.

인조 때까지 살았던 인물로, 호는 풍암(楓巖)이다.

임진왜란 때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덕홍(德弘)ㆍ덕령(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을 전라도 곳곳에서 격파하였다.

그러나 김덕보는 큰형 덕홍(德弘)이 금산싸움에서 같이 참여했다.

그러나 형은 막내였던 그에게 "너는 고향에 내려가 집안을 보존해야 한다"고 종용했다.

그러한 큰형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노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가의 운면은 여기서 그친것이 아니었다. 중형 덕령(德齡)도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다가 1596년 28살이었을 때 이몽학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한

일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해 누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이를 슬퍼하여 세상을 등져야 했다.

큰형은 이것을 연려해 집안을 보존케 하고저 동생을 고향으로 돌려 보낸

 것이었던 것이었다.

막내였던 덕보(德普)는 모든 것을 잊고자 무등산 수려한 원효계곡을

찾아 터를 잡고 이 정자를 지어 이곳에서 도학과 경륜을 쌓으며 은둔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임진 이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병으로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풍암정에는 김덕보 등의 제영(題詠)을 새긴 판각이 걸려 있다.

이곳의 제영시에서 그의 성품과 심정을 대신할 수 있다. 그와 절친한 친구,

지교(管鮑之交)했던 의병장, 이조판서 추증된 문무를 갖춘 대학자였던

보성출신 우산(牛山)·빙호(氷壺)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 6∼1654 효종 5)은

그를 위해 시를 읊는다.

고향에 친한 벗 몇 사람이나 될까 / 오직 그대와 조석으로 오고갔네
한가한 날 대 평상에서 청담을 나누었고 / 타향살이 몇몇해에 머리만 세고
故里親朋問幾人 與君朝暮往來頻 竹床暇日淸談會 關洛秋風白髮新

세상 인정은 개었다 흐렸다 관포(管鮑) 우정이 부끄럽구나/ 그대와 맺은

교분 뇌진보다 높았네. 숨어사는 그대에게 말 한마디 부탁하니/ 빛나는 학문을

끝까지  감추고 참마음을 기르소서.
雲雨世情羞管鮑 漆膠心事笑雷陳 寄言懶病楓巖子 終始 光學養眞

덕보는 1785년(정조 9)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과 상소에 의해

큰형 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또 정철의 넷째 아들이자 기와(畸窩)

정홍명(鄭弘溟 1582 ~ 1650)은 이곳에서 감정을 시로 표현했다.

대낮에 어찌하여 사립문을 닫고서 / 홀로 속세 인간들과 오가는

인연 끊었는가 책상에는 황정경(송나라 후기의 시인) 있고 동이엔 술있네

/ 이 늙은이 한가로움을 세상사람 누가 알랴

풍암의 물과 돌은 예와 다름이 없는데 /
십년을 돌아다니느라 나막신만 닳았네
홍안청춘은 꿈속에 흘러가고 / 백발노옹 외롭고 고달프다"며 그를 위로했다.



또 1611년(광해군 3) 50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였던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수축에

깊이 관여했던 관해(觀海) 임회((林檜 1562 명종 17∼1624 인조 2)도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시월이라 산중은 아직 안추어/뜰엔 국화가 만발하네
청상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글거리, 백주가 어찌 손님을 꺼리리

사마 상여는 무릉 땅에 병으로 눕고/도연명은 벼슬 버리고 술만 마신다
내일 아침 서풍이 곧 불어 닥치면, 해와 함께 구슬피 울리네

정홍명은 풍암기(楓巖記)에서 이 일대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풍암정이 자리하고 있는 서석산(무등산)은 웅장하여 호남에서 으뜸간다고

칭하는 것은 수석의 기이함이 많은 까닭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

 남쪽에 사인암(舍人巖)이 있는데 기기

묘묘한 돌이 많고 그 아래 사찰이 알맞은 지형에 들어서 있다.

높고 가파른 곳이 많아서 다니기가 위험하여 인적이 드물다. 내가 남쪽에 내려와 산지가

오래되었는데 본래 각기병을 앓아 10분의 2, 3정도 밖에 찾아다니지 못해서 지극한 한으로

여겼다. 금년 겨울에는 우연히 병이 있어서 산방에서 묵으며 음울한 마음을 달래고자

돌아보았지만 오르기가 어려웠다.

어떤 이가 풍암(楓岩)은 이곳으로부터 몇 리 안 되는 거리인데 거처할만한 조그만 감실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너무 기뻐서 말을 달려 감실에 이르니 과연 외진 곳에 그윽하고 고요한

정취가 있었다.

매양 밥 먹기를 마치면 같이 사는 2, 3인과 함께 바위 아래를 소요하다가 풍암이란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을 궁구해 보았다. 큰 바위 사이에 단풍나무 백여 그루가 있는데 시내와 못에

빙 둘러서 비친다. 바야흐로 가을 서리 맞은 잎이 물에 잠기니 물 색깔이 물들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시냇물은 매우 빨리 흐르며 또 많은 돌로 물의 흐름이 빙 돌아 얽혀져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기도하고 그 소리가 돌 떨어지는 소리처럼 맹렬하여 벼락 치는 것 같아 움츠러들만 했다.

장마로 물이 불어 밀치면 다투어 빠르고 거세어 골짜기에 벼랑이 파였고 물가에 다니는 자는

귀가 막혀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니 이 때문에 여름날에는 사람들이 거처하기 싫어하였다.

내가 찾아 온 때는 마침 추운 때여서 물이 줄어 바위 자태가 그대로 드러나 그 참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감실로부터 몇 걸음만 지나 흐르는 물 사이의 돌을 딛고 건너면 바위틈에

소나무가 있는데 높이는 한 장 남짓하고 그 뿌리는 드러나 베고 잘 만하였으며 가지와

잎은 수면을 어름어름 덮었다.



바위의 모양은 넓고 평평하여 십여 명이 벌려 앉을 수 있었다.

그 아래 물이 모여 못을 이루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못으로 인하여 그 아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기이하다. 높이 오르면 넓고 평평한 정상이 있어서 즐겁게 놀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 모습이 떨어질듯이 험준하여 멀리서 우러러 보기만 하고 오르지 못하는 곳도 있다.

안석 같은 것은 의지할 만하고 널찍한 것은 음식을 늘어놓을 만 하였다. 웅덩이 같은 것은

술잔을 띄울만하고 바둑판같은 것은 바둑알을 튕길 만하였다. 이처럼 천백가지 형상이 있어

물가 모래는 부드럽고 나무는 그늘지어 곳곳에 드리우니 경색이 각각 다르다.

이것을 얻으면 저것을 잃고 새로운 것을 보게 되면 옛것을 잃어버리니 가히 한 두 마디로

말 할 수 없었다.

새로 정자를 지은 때라서 이름이 없었다. 나와 2, 3인이 종일토록 구경하다가 마치고 돌아

오려하니 (다정한 연인을) 이별하는 듯 돌아보게 되고 얻은 바가 있는 것처럼 마음이 즐거웠다.

무릇 10여일을 머물면서 나가 놀 지 않은 때가 없었고 놀 때 마다 반드시 기이한 모습을 보았다. 참

으로 승경 중에 승경이었다. 내가 서석의 모든 승경을 두루 편력하지는 못했지만 이곳의 위로

부터 산허리까지 이른바 이름 있는 사찰은 모두 한 두번 유람하였다.

(그러나) 수석이 이곳을 따를만한 곳은 없었다. 또 괴이한 것은 마을의 촌락으로부터 몇 리

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런 승경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것이 지금에 드러

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또한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호라. 땅도 역시 이러한

만남에 의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리라.

풍암의 천석(泉石)은 의구한데/하마 십 년에 나막신만 닳았네.
홍안청춘(紅顔靑春)은 꿈속에 흘러 가고/백발노옹(白髮老翁)은 외롭고 고달프구나.
楓岩泉石古依然 蠟 從遊己十年 勝事至今空夢想 白頭形役自堪憐


그리고 많은 문인묵객들의 시와 함께 수 백년이 흘러 오늘날 까지 좋은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그는 '마음가는 대로 읊음' 이라는 제목의 시로 감흥을 풀어냈다.

늙으막에 단풍나무 언덕위에 두어 칸 집 지으니 / 바위 앞엔 대나무 푸르고 뒤로는 산봉우리

겹겹이 둘렀네 창문 남쪽을 향해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 물가의 정자 한 더위에도 춥구나.
晩結楓崖屋數間 巖前脩竹溪重巒 向陽簷牑三冬暖 臨水亭臺九夏寒

영약(靈藥 불로초) 구하려고 신선따라 땅을 파고 좋은 책은 야인(野人)들이 빌려다 본다 .
이곳에 저절로 편안한 삶이 있는데 / 어찌 바다건너 봉래산(蓬萊山)산을 찾을 것인가
靈藥每從仙侶斲 好書時借野人看 捿身自有安閒地 何用蓬壺海外山

당시에 일대는 인적이 없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를 그릴만한 곳이라고 해도 될 법했을

것이다. 이 밖에 이름있는 여러 문인들이 출입하였다고 전한다. 이 정자하나가 후손들에게

이렇게 많은 혜택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이곳의 주인들도 정녕 몰랐을 것이다.

그중에 풍암정에서 호남을 의리의 사나리라고 일컬은 장본인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

빠지면 섭섭하다.

나무는 창창(蒼蒼), 돌은 기기(奇奇)/이 동천(洞天)이야 말로 유수(幽邃)한저!
매화꽃 그림자 빗긴 곳 찾아가/ 한가롭게 은하수같은 폭포를 한가히 보고 있네
木益蒼蒼石益奇 洞天無地不幽姿 偶來梅影橫斜處 間看銀河倒掛時

또 1564년(명종 19) 이이()·유성룡() 등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판관과 부사를

지낸 송파(松坡) 임식(林植 1539 중종 34∼1589 선조 22)도 정자의 걸터 앉고 만감이 교차하는

긴 회포를 풀어낸다.




님은 백운간(白雲間)에 있는데/나는 꿈속에서 푸른 산만 안고 돌았네.
청로(淸路)에 옷 젖으며 선뜻한 대숲을 지나/냉풍(冷風)을 끼고서 서늘한 솔 숲을 지나네.

장생보결(長生寶訣)은 인생이 원하는 바이고/연수연방(延壽延方)을 내 여기서 보았다네.
잠을 깨어 놀라 일어나 보니/효천(曉天)엔 안개 걷히고 추산(秋山)은 아물아물

정철의 후손으로 예안현감을 지낸 송음(松陰) 정재성(鄭在誠)도 들렸다.

천지간에 넘치는 정기(精氣)/부딛히면 물이 되고 맺히면 산
봄철 처사골에 방림(芳林)은 고요하고/해 저문데 장군나무엔 바람은 차다.
一氣盈盈天地間 激爲流水結爲巒 春歸處士芳林靜 日暮將軍大樹寒

예나 지금이나 올라보면 슬픈 이곳에/이제도 노래하고 술 마시고 울며 서로 보네.
빈 정자에 초목만이 스산하게 남았네./나무꾼들아! 아예 이 산에는 오르지 말라.
從古登臨悲此地 卽今歌酒泣相看 虛亭草木如相守 爲語樵人莫上山



16세기 호남지역 한시에서는 도학적 가치와는 변별된 세속적 가치의 초탈과 경물 자체의

감각적 형상화가 두드러져서 외부의 사물과 자연 경물에 대한 심미적 정서로 나타난다.

시의 심미의식은 정감이 형상 속에 완전히 융합되어야 하며, 유형의 형상 속에 무형의

정감을 조화시킬 때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고 있다. 이러한 심미적 정서는 산수를 비롯한

자연경물과의 화합 속에서 생명의 희열과 일치감을 갖게 한다. 유수(流水)문화 장점이다.

참고문헌=누정제영 광주광역시 .무등산권 문화유산 해설

호남문화연구 전남지역의 누정조사 연구(1)1984
김은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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