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사리함
- 세계 정상의 한국 문화유산 (2) -
"이게 언제 만들어진 것이죠?
정말 13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까?
정말 대단합니다.
1300년 전이라면 독일은 아무것도 없던 시절입니다."
- 4월 28일 국립원자력연구소 주최 학술회의에 참석한 독일 과학자 -
"이건 정말 위대한 유물입니다.
영국은 1300년 전은 고사하고,
지금도 이렇게 정교하고 섬세한 것은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게 오랜 전에
이런 합금 지식과 금속공예기술이 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 4월 11일 서울대 주최 원자력안전회의에 참석한 영국 과학자 -
최근 국내에서 열린 원자력 관련 행사 때
사리함 영상을 본 외국 과학자들은
감은사지 사리함의 정교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신라의 초정밀 금속공예기술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감탄과 놀라움의 찬사를 연발했습니다.
4월 11일 서울대 주최 원자력안전회의에서는 100명의 외국 과학자들이,
그리고 4월 28일 열린 국립원자력연구소 주최 원자력학술회의에서는
250명의 외국 과학자들이 사리함 영상을 보았습니다.
세계 정상의 우리나라 문화재
중 이 달에는 감은사지 사리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법당은 사라지고 현재는 두 탑만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감은사지.
1300년 전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 626~681)은
날로 극심해지는 왜구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더욱 굳건히 지키고자
동해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사찰 건립을 발원했다.
그러나 왕이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하자
아들 신문왕이 선왕의 뜻을 좇아 682년에 절을 완공하고,
부처님과 선왕의 은혜를 감사히 기린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지었다.
"내가 죽으면 호국용(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
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앞바다에는 수중릉이 만들어 졌고,
감은사는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자유롭게
이 절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 후 1300년의 시간이 흐른 1996년,
감은사지 동탑(東塔)의 보수를 위해 탑신을 들어냈을 때,
그 안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지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이다.
사리장엄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공예품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가 전파된 동양 각국의 수많은 사리함 중에서
유독 감은사지 사리함이 주목을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감은사지 사리장엄 내함(좌)과 외함(우)
감은사지 사리함은 외함과 내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네 면에 사천왕상이 부조된 외함,
그리고 불사리를 봉안한 내함의 의장(意匠)은
다른 나라 사리장엄에서는 시대를 불문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감은사지 사리내함은
불사리를 곧 부처님 자체로 보고
보궁(寶宮)안에 모신 것을 상징한다.
단순히 사리 봉안만을 위해 함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사리함을 하나의 축소된 불국토로 꾸민 것인데,
이러한 착상이야말로
다른 나라의 사리장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점이다.
게다가 사리함 장식 하나하나에도
현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높은 기술과 깊은 신앙심이 녹아있다.
섬세하고 화려하게 꾸민 사리 내함의 높이는 18.8cm.
손바닥 한 뼘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내함 지붕에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 풍탁이 달려 있는데,
그 무게는 0.04그램.
사람이 느낄 수조차 없는 무게를 갖고 있다.
풍탁의 몸체는 두께 0.1mm의 얇은 금판을 말아서 만들었고,
풍탁 사슬의 굵기는 머리카락 굵기이다.
<풍탁확대사진>
이 풍탁을 현미경을 사용하여 200배로 확대해 보면
풍탁의 표면에 지름 0.3mm의 금알갱이들이
3개씩 붙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픙탁 뿐 아니라 수정 사리병의 뚜껑 등 사리함에는
0.3mm의 금알갱이가 수없이 부착되어있다.
맨 눈으로는 식별하기조차 어려운 이 작은 금알갱이들을
고대 장인들은 어떻게 부착시켰을까?
금 알갱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가느다란 금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에 높은 온도의 열을 가하면
표면장력에 의해 순식간에 둥근 모양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알갱이들을 세 개씩 모으고,
금알갱이 사이에 90%의 금과 10%의 은이 섞인 땜쇠를 붙인다.
그리고 열을 가하면
순금보다 녹는점이 낮은 땜쇠가 먼저 녹으면서 금알갱이들이 부착된다.
순금이 녹는 온도는 1064도이고,
땜쇠의 녹는 온도는 1052도이다.
온도가 1052도보다 낮으면 아무 것도 녹지 않고,
1064도 보다 높아지면 땜쇠뿐 아니라
금알갱이 까지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에,
1052도와 1064도 사이로 온도를 조절해야 한다.
즉 금알갱이는 녹지 않으면서
땜쇠만 녹게 하는 온도의 차이는
12도 내외에 불과한 것인데,
오늘날과 같이 전열기구나 없던 시대에
(당시 장인들은 숯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됨)
1000도가 넘는 고열에서
12도의 미세한 온도의 차이를
어떻게 식별하고 조절하였는지도 불가사의하다.
2002년 국내의 한 방송국에서
고대 유물을 전문적으로 재현하는 최고의 장인을 찾아
이 풍탁의 재현을 부탁했다.
그런데 장인이 최신의 전열기구를 가지고 작업해 낸 풍탁에서는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았을 때
금알갱이와 풍탁 표면 사이에 땜질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오늘날의 기술이 1300년 전의 기술을 능가하기는 고사하고
그대로 재현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사진설명) 풍탕에 장식된 0.3mm알갱이를 200배 확대모습.
왼쪽은 1300년 전의 진품이고 오른쪽은 2002년 제작된 복제품이다.
신라시대 진품은 알갱이가 땜쇠의 흔적이 없이 말끔히 부착되어 있고,
현대 복제품에는 땜쇠의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감은사지 사리함은 실로 작지만 거대한 유물이다.
그 안에는 0.3mm의 예술을 완성시킨 신라의 초정밀 기술력과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려는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출처 금강경독송회 2010년 5월회보
http://cafe.daum.net/diamondyouth/1fQ/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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