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시점인 1592년(선조 25년)부터 전쟁이 마무리되던 1598년(선조 31년)까지
7년 동안의 기록. 1695년 일본에서도 이미 출간되는 등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국보 제132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를 꼽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서애이다.
21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퇴계의 문하에 들어 ≪근사록(近思錄)≫ 등 성리서(性理書)를 배웠는데, 퇴계는
그를 만나본 뒤에 하늘이 낸 인재라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퇴계의 예언대로 서애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가
위난에 빠졌을 때 큰 공을 세웠다.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이 땅을 벗어나시면 조선은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두려움에 떨던 선조(宣祖)는 여차하면 중국으로 넘어갈 요량으로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피난하려 했다.
조정의 일부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지만 서애는 극구 반대하여 자칫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민심의 동요를
잠재웠다.
선조가 장수로 삼을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했을 때는 지방 수령으로 있던 이순신(李舜臣)과
권율(權慄)을 천거하여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키게 만들었다.
소극적이던 명나라의 원군을 설득해 끝까지 왜적을 몰아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명나라의 신병법인 기효신서법(紀效新書法)을 배워서 군사들을 조련하였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사력 향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당파에 따라 서애의 활약상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 몇 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그의 탁월한 안목과 기여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 존덕사에 서애와 그의 셋째아들 유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다. 문화재청 제공
#사상의 정수가 담긴 잡저(雜著)
서애의 문집은 가장 먼저 잡저(雜著) 부분을 읽어 볼 필요가 있다.
서애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글들을 모아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잡저는 송(宋)나라 역사를 읽으면서 당대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들에 대한 평설(評說)을 기록한
<독사여측(讀史蠡測)> 등,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주학(程朱學) 계통의 이론을 담은
<주재설(主宰說)> 등과 양명학을 비판하는 <왕양명이양지위학(王陽明以良知爲學)> 등은 서애의
학문적 사상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글들이다. 일견 여타의 정주학자(程朱學者)들과
비슷한 견해를 보이지만,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읽어보면 양명의 주장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은연중에 보여주기도 한다.
“왕씨의 의도를 잘 살펴보면, 대개 당시 세상의 학문이 외면적인 것으로만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결같이 본심(本心)을 위주로 하여, 무릇 마음을 써서 강구하는 행위를 모두 행(行)이라고 여겼던
것이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가 너무 지나치게 곧게 된 경우이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하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서애는 부단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지만,
선조는 계속해서 윤허하지 않았다.
“의리상으로는 비록 임금과 신하였으나 정으로 볼 때에는 친구 사이와 같았다. 나만큼 경을 잘 아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당인들은 집요하게 그를 공박하였다. 마침내 그가 57세이던 1598년에 파직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 때 관작을 삭탈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애초에 벼슬에 초연했던 서애로서는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쟁의 참상을 기록하고 전란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유비무환의 교훈을
담은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을 담고 있어서 숙종 연간에 이미
일본에서 입수해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지만, 나라를 향한
서애의 충정은 죽는 날까지 식지 않았다.
나라 위한 마음은 늙어서도 그대로라 / 老去猶存報國心
세모(歲暮)에 빈산에서 비장하게 읊조리네 / 空山歲暮一悲吟
노년이라 매사에 감회가 일어나니 / 衰年觸事多成感
무단히 눈물이 홀연 옷깃을 적시네 / 危涕無端忽滿襟
#사관(史官)도 놀란 조문 행렬
대신이 세상을 떠나면 3일 동안 조정은 공무를 중지하고 시장은 문을 닫는 것이 전례였다.
서애가 고향 풍산(豊山)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는데, 시장 상인들은 애도의 뜻으로 하루 더 문을 닫았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 사관의 평이 흥미롭다. 천여 인이나 되는 조문객이 한 때 서애가 살았던
묵사동(墨寺洞)의 빈집에 모여 조곡(弔哭)을 하였던 일을 전례가 드문 일이라고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 인물이 조정에서 발자취가 끊어졌고 상(喪)이 천리 밖에서 났는데도 온 성안 사람들이
빈 집을 찾아 모여서 곡을 하였으니, 아마도 시사(時事)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
데도 후임으로 수상(首相)이 된 자들이 모두 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추억하기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선조실록은 북인(北人)이 중심이 되어 기술했기 때문에 서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내용들이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사람들이 서애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서애집(西厓集)
서애집(西厓集)은 조선 선조조의 명재상이었던 류성룡(柳成龍)의 시문집으로,
원집(原集) 20권 10책, 별집(別集) 4권 2책, 연보(年譜) 3권 2책 등 총 27권 1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조 11년(1633) 봄에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서 원집과 별집을 합쳐 초간하였고,
고종 31년(1894) 가을에 하회(河回)의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연보를 추가하여 중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82년에 번역, 출간하였다.
류성룡의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