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적지
죽림정사
중인도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王舍城이라고도 함)
북방에 있는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에 최초로 생긴 불교사원.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죽원가람(竹園伽籃)이라고도 한다.
코살라국 사위성(舍衛城)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함께
불교 최초의 2대가람(二大伽籃)으로 불린다.
석가모니가 생존해 있을 때 자주 이곳에 머물면서 설법한 불교 포교의 중심지였다.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 의하면 가란타죽림은 가란타(迦蘭陀 Kalandaka) 장자의
소유로서 왕사성의 여러 동산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이었다.
가란타 장자는 본래 외도(外道)를 숭배했으나 뒤에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
불교로 개종하면서 이 죽림을 승단에 기증했다.
이 죽림에 당시의 마가다 국왕인 빔비사라 왕이 가람을 지어서 정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과〈사분율 四分律〉에 의하면
이 죽림도 빔비사라 왕이 보시한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대나무는 우리나라와 달리 무더기로 나 있다.
카란다 연못
불교최대의 대학 나란다
인도의 Nalanda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이곳 출신인 사리불과 목건련에 의해
인연의 뿌리가 내려졌고 그후 승단이 형성되면서 종합수도장으로 성장하여 세계
최초, 최대의 불교대학으로 교육과 사원의 기능을 같이한 곳이었다.
나란다는 길이 11km, 폭 5km로 1만명의 학인 스님과 1천 500명의 교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며, 5세기 굽타 왕조 시대에 설립되어 1,199년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인도뿐만 아니라 한국·중국·일본과 태국·베트남
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이 몰려들어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당대(唐代)에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 스님도 이곳에서 5년간 공부하였고 673년
이곳에 수학했던 의정 스님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의하면,
의정스님이 인도를 방문한 서기 671년 이전에 이미 4명의 신라스님들이 이곳
나란다에 와서 수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낯선 땅 수십만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목숨을 건 구도의 길을 걸어 이곳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했던 우리나라 신라스님들의 이름은 혜업(惠業), 현태(玄太), 현각
(玄恪), 그리고 아리야발마라는 이름의 스님이다.
나란다의 찬란한 빛이 파괴된 것은 이슬람의 침공 때문이었다.
1199년 무하마드는 불교사원들을 무차별 파괴하였고 스님들은 그들의 만행 앞에
처참하게 죽어갔다. 나란다 불교대학의 거대한 유적은 지금 10분의 1정도 발굴하
였고 기숙사를 겸한 사원터 14개소가 드러났다.
유적지 한켠에 부처님 10대 제자중 지혜 제일로 꼽히는 사리불 존자의 사리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으며 그 조각상들도 그대로 볼 수 있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굴러서 이제 불태운 자도 불태워진 자도 남지 않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깨어진 주춧돌은 지금도 옛 영화를 잊지는 않았으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이 무성한 잡초더미를 디디고 우렁찬 찬불(讚佛)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높은 사리불존자의 사리탑에 예전엔 올라갈 수 있었다.
그곳에 오르면 사방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아쉬웠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떨어진 이후로 오르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곳곳에 경비가 서 있었다.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고향 바이샬리(Vaishali)
비하르 주 북서부의 파트나 북쪽으로 간다크 강을 끼고 있다.
고대 리차비 공화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여러 도로를 통해 남쪽의 라자그리하, 북쪽의 카필라바스투·슈라바
스티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비라가 바이샬리에서 태어나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붓다도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다.
5세기에는 중국의 승려 법현(法顯)이 순례해 바이샬리의 주요 승원과 사찰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붓다가 사망한 후(BC 483경) 불교도들의 2차 결집회의가 열려
수도자의 행위규범을 규정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중인도의 정세는 속칭 ‘고대 16국’이라는 병립체제가 무너지면서 코살라와
마가다라는 두 강대국으로 흡수되며 전제군주제도로 변해가는 과도기 상태였는데
바지안 연합만은 아직 공화국으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동쪽의 미틸라를 중심으로 하는 비데하족과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하는 릿차비족으로
구성된 이 바지안 연합은 이상적인 민주공화정치를 펴나가면서 평화롭게 살았다고
하는데, 그렇기에 붓다도 특별히 이 나라에 대해서 애정을 표시하여 종종 제자들에게
“만일 교단이 여기 랏차비족들이 보여주는 예에 따라 운영된다면 바지안 연합처럼
오래 지속되고 번영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경전은 전하고 있다.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어느 날 탁발을 하고 돌아오는 언덕에서 붓다는
코끼리가 먼 곳을 쳐다보듯이 성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아난다야, 이제 내가 저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하시고 3달 뒤에 열반할 것을 예언하셨다 한다.
여기서 “저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강조한 이유는 붓다가 바이샬리의 거리와 사람들의
인정과 바지안의 평화로움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
이외에도 이후 닥쳐올 그곳의 운명을 예견하고 이후의 세계역사를 통하여 바이샬리 같은
민주공화제도가 수천 년이 지나야 다시 출현할 것이라는 아쉬움을 토로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는 붓다가 이미 그곳으로 오기 전 왕사성에 있을 때 그를 후원하던 마가다왕국
이 후에 새로 천도하는 파트나에서 대제국을 이루리란 예언과 같은 초능력적 예언에 부합
하고 있다. 이 랏차비족은 여래의 열반 뒤에 사리의 분배 시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
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불사리를 8등분 할 때 이 랏차비족은 한 몫을 가져와 바이샬리
에다 사리탑을 세웠다.
그런데 후에 다른 나라로 흩어진 불사리가 모두 산실되었을 때 아쇼카왕이 전국에 8만4천
사리탑을 세우려고 원을 세워 사리를 구하려고 했으나 확실한 근거가 있는 진짜 불사리를
얻을 수 없었다. 오직 바이샬리의 사리탑만이 원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였기에 이에
아쇼카는 이 사리탑을 헐어 사리를 분배하여 다시 전국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런, 다소 설화적인 문제에 대하여, 현장은 다음과 같이 다시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현장이 확인하여 인용했다는「인도기」의하면, 그 안에는 본디 여래의 사리가 1곡(斛) 있었
다고 하는데, 그런데 아쇼카 왕이 발굴하여 아홉 말을 반출하고 나머지 한 말만을 남겨 두었
다고 하는데, 나중에 어떤 국왕이 다시 꺼내고자 할 때 대지가 진동했기 때문에 발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만약 위의 설이 사실이라면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래의 진신사리는
모두 이 바이샬리의 랏차비족에 의해 보존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자료참고/http://blog.daum.net/bolee591
아쇼카석주
대략 15m가 넘는 높이로 그 위에는 동물상들이 올려져 있고 석주 아랫부분에는 왕의 칙령이
명문(銘文)으로 남아 있다.
인도 전역에 있는 아쇼카석주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 있고, 맨 위의 사자상은 부처님
열반지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다.
원숭이 연못(猿王奉蜜池)
아쇼카 석주 남쪽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는 연못.
이 연못은 원숭이 떼가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도록 판 연못이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하여 살기가 넉넉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하지 않았다.
발우를 어느 지역에 한 줄로 놓아두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담아 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부처님이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발우에 섞어 놓았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들
중에서 부처님 발우를 골라내어 근처 나무에 올라 꿀을 따서 부처님게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 원왕봉밀(猿王奉蜜)의 이야기는 인도의 모든 불교미술 작품에 두루 나타난다.
케사리아 전탑
부처님께서 최초로 가사를 받은 곳으로 알려진 곳.
빡빡한 일정과 무더위 때문?에 가이드 선생은 제안을 했다.
칠엽굴과 케사리아 전탑을 거래하자고...
하여 참배하게 된 이곳.
가장 높은 탑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세계에서인지? 인도에서인지?
아님 불교 스투파에서 가장 높다는 것인지?
높이는 얼마인지?
현재 발굴상태에 있어 고증할 수 있는 정확한 아쇼카석주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파바마을 춘다의 집터
파바성에 살던 대장장이의 아들로 부처에게 마지막 공양을 한 사람이다.
춘다라고도 하며, 음역하여 순타(純陀)라고 한다.
속세 나이로 여든이 넘은 부처는 제자들과 함게 열반(涅槃)의 땅으로 정해진
쿠시나가라를 향하여 가다가 파바성에 있는 춘다의 망고나무 숲 사두원에 도착하였다.
춘다는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까지 찾아가 부처의 가르침을 들었던 열렬한 재가 신자
였는데, 부처가 마침 자기 집 근처를 지난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며 부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공양을 드리고, 부처에게는 특별히 진귀한 찬다나
〔& #26676;壇木〕의 버섯요리를 대접하였다.
그러자 부처는 이 음식으로 자신이 병에 걸릴 것을 미리 알고 ‘이 버섯음식은 다른 제자
들에게는 절대 주지 말라.
하늘의 범천도 이 음식을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당부하였다.
공양을 마친 부처님은 그를 위해 설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춘다의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버섯(인도 가이드의 설명으론
감자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였다)음식이 식중독을 일으켜 부처는 갑자기 등이
아파오고 속이 불편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제자들이 화를 내며 춘다의 공양이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부처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말렸다.
‘춘다는 이 공양으로 큰 공덕의 과보를 받을 것이다.
내가 도를 이루었을 때 처음 공양한 사람이나 내가 열반에 들려 할 때 마지막으로
공양한 사람이나 그 공덕이 서로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쿠시나가라로 가는 22KM에 무려 25번이나 휴식을 취했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어 부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부처는 결국 이 병이 원인이 되어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열반에 드셨다.
일정에 없던 참배지다.
성지순례 시즌이 아니고, 무더위가 시작된 인도 도로사정이
복잡하지 않았고, 또한 스님들이 시간을 철저히 엄수해서
덤으로 참배하게 된 곳이다.
해마다 수차례 성지순례를 하는 가이드 선생도 5년전에 참배했다하니...
쿠시나가라
인도 힌두스탄 평야에 있는 지금의 카시아(Kasia)이다.
불타의 생애와 관련되는 4대 성지의 하나로서 그 가까이에 히란냐바티강(江)이 흐르고 있다.
불타의 시대부터 외딴 곳으로서 당시는 마라족(族)이 살았고 사라쌍수(沙羅雙樹)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열반에 들어간 불타를 화장(火葬)한 곳이다.
현재 5세기경의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열반상을 안치한 열반당(涅槃堂)이 있다.
사라쌍수가 있던 곳
춘다의 마지막 공양을 받으시고 부처님께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카쿠쯔타(Kakutstha)의
강둑에 닿으신다. 그 곳에서 목을 축이고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Kushinagara)에
닿으셨다. 사십여년을 곁에서 모신 아난다(Ananda)에게 사라(Sara)나무 밑에 침상을 준비
하라고 이르신 후 부처님께서는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마치 사자
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고요히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스(Mallas)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오늘밤 자정 무렵 여래는
열반에 들리라고, 아난다여, 나는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구나, 나의 여정은 이제 막을 내리려
하노라. 나는 이제 팔십세가 되었구나. 비유컨대,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음과 같을지니라.
육신이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만큼, 늙고 병들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던가,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은 다 사라져 없어지리라고.
그러나 여래는 육신이 아닌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내가 가르친 진리는 언제나 너희들과 함께 하리라."
아난다는 눈물을 삼키며 이 슬픈 소식을 말라스의 사람에게 전하고, 다시 부처님께 그 삶을 연장
시킬 수 없겠느냐고 간청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로 제자들을 달래시고, 슬픔에 잠겨 사라수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자 했다.
이때 쿠시나가라 늙은 수행자 수바드라가 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평소의 의문을 풀어야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수의
숲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님께서 지금 매우 피곤하시고 병을 앓고 계시니
번거롭게 해서는 아니 된다고 그의 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수바드라를 가까이 오도록 이르시고 말씀하시었다.
"진리를 알고자 찾아온 사람을 막지 말아라. 내 설법을 듣고자 온 것이다."
부처님은 수바드라를 위해 설법을 들려 주셨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
에서 제자가 되었다. 수바드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것이다.
이제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시간이 가까워 지자 무수히 모여든 제자를 돌아보시면서
다정한 음성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시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위에 기름처럼 겉돌지 말아야 한다.
함께 내 교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깨달음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이든지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자리이타의 법을 다 갖추었으니 만일 더 오래 머루른다 해도 이 이상 이익
될 바가 없을 것이다.
마땅히 제도할 사람은 이미 다 제도했으며 아직 제도 받지 못한 이가 있더라도 득도의
인연을 모두 지었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제자들은 정법을 서로 전하고 이어 받으며,
여래의 법신이 상주하여 항상 사라지지 않게 하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기전 아난에게 마지막
남긴 유훈(遺訓)을 간략히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한다.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 제행무상 불방일정진(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諸行無常 不放逸精進 :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라는
'열반송(涅槃誦)'을 남기셨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
열반상 기단에 아래사진의 마지마 제자 수바드라와 함께
좌우로 최후의 공양을 올린 춘다,
슬피우는 아난존자의 상이 있는데
아쉽게도 카메라에 담질 못했다.
다비당
부처님 다비를 모신 장소로 5세기경 세원진 것으로 추정되며
1876년 발굴되어 미얀마 사원에서 다시 복원한 곳
녹야원의 다메크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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