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敎 판사 임명·승과제 부활 권력 업은 피동적 부흥 ‘한계’

 


문정왕후는 기질이 드세고 권력의 맛을 아는 여류 정치가였다.

그녀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할 줄 알았으며 권모술수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그녀의 아들 명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르자 궁중의 관례대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이는 정계에 태풍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무한한 정치권력을 틀어쥐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정책을 수행해 나갔다.

 

그녀는 여러 절을 내원당으로 지정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절에 향을 보내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 또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 옆에 봉은사를 화려하게 중창하였다.

봉은사는 두부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절이었는데 이제 불교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보우스님 등용, 불교중흥 시도

 

이런 그녀의 행동을 두고 선비들은 비난을 퍼붓고 나섰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을사사화로 벼슬아치들이 떼죽음을 겪은 터라 함부로 대들지 못하였다.

1549년(명종 5) 문정왕후는 영의정 상진(尙震)에게 이런 비망록을 내렸다.

“군역을 질 양민이 날로 줄어들어 군졸들이 곤궁한 모습이 지금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그 까닭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아들 너댓을 두면 군역의 고통을 지지

않으려고 모조리 도망쳐 승려가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승려의 무리가 날로 늘고 따라서 군대의 경비로 날로 줄어들어 지극히 한심

스런 지경에 이르렀다.

조종조에서 이룩한 〈경국대전〉에 선교 양종을 설립한 것은 불교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승려가 되는 길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근래 이를 폐지하여서 구제할 방도를 잃어버렸다”〈명종실록 5년〉

문정왕후는 교묘한 말로 잘못된 불교정책을 말하고 연산군에 의해 폐지된 승과제도를

부활하고 봉은사와 봉선사를 각기 선종 교종의 중심 사찰로 지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다음 해부터 도첩제를 실시해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전국에 걸쳐 300여개소의 절을 공인하였다.

그리고 회암사에 잠시 머무르던 보우(普雨)스님을 봉은사로 불러올려 불도를 펴도록

하고 이어 선종판사로 임명하였다.

또 수진(受眞)스님을 교종판사로 삼아 봉선사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면 보우스님은 누구인가.

그의 초기 내력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남긴 글을 종합해보면 금강산 마하연암에서 머리를 깎고 장안사, 표훈사 등지에서

수도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스승도 용문사 견성암에 주석하였던 지행(智行)스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 따르면 그는 대장경을 모두 섭렵하고 유가의 최고 경인 〈주역〉을 읽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불경에 해박한 선객으로 유교 경서에도 밝은 승려였던 것이다.

그가 무슨 연유로 회암사로 나왔는지는 모르나 겉으로는 풍병에 걸려 치료하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문정왕후가, 지식이 많고 산 속에서 수도하는 그를 불교 중흥의

책임자로 내세우려 은밀하게 불러 올린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보우스님은 불교 중흥의 책임을 맡아 나섰다.

이렇게 되자 눈치를 살피던 일부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사생결단의 결의로 들고 일어났다.

성균관 유생들은 애꿎게도 보우스님을 죽이라고 연일 소문을 올렸고 언관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대하는 건의를 올렸다.

보우스님이 서울에 와서 선종판사의 직함을 받을 때까지 6개월쯤에 걸쳐 양종 부활의

반대와 보우스님을 죽이라는 내용의 건의가 4백98회에 이르렀다.

문정왕후가 그래도 들어주지 않자 성균관 유생들은 몇 달 동안 성균관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비록 수진스님과 같은 자격으로 판사의 직함을 받았으나 무게는 선종에

있어서 그에게 중흥의 책임이 맡겨졌다.

그도 여느 벼슬아치처럼 임금 앞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임명장을 받았으며, 일부 사판

승들은 불교의 공무를 보려 소관 부서인 예조에 드나들었다.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 규정은 이제 빈 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승과에 든 스님들은 벼슬아치와 동격으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보우스님의 불교관을 살펴보자.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선교일체를 주장하였다. 그는 비록 선종판사를 맡았으나 교종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는 〈화엄경〉의 교리를 찬양한 시를 남겼는데 이사원융(理事圓融)의

사상이 현실적으로 요구된다고 보았을 이다.

그가 보조국사의 선교일치 사상을 계승하여 당시 교계에서 서로 우위를 주장하는 논쟁을

타파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양종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다.

“지도(至道)는 종래로 피아(彼我)가 없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종능(宗能)을 가지고 싸우는가.

선종은 두 절(봉은사 봉선사)에서 다 임금의 교화로서 일불승(一佛乘) 한 가지로 배워온다.

교가 곧 선이요 선이 곧 교다.

얼음은 원래 물이요 물도 원래 얼음이다.

선과 교가 참으로 둘이 아님을 알고자 하거든 수미의 최정상을 가져 보라”

 

佛·儒융합 주창

 

그는 또 교천(敎淺) 선심(禪深)의 논쟁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의 선교사상은 각기 궁극에서 깨침에 도달한다는 선교일치가 아니라 부처의

마음이 선이요 부처의 말이 교이기에 둘은 일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일체관은 선교의 갈등에 참신한 논리를 제공하였다.

그런 탓으로 당시 선교 융합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왔다.

다음으로 유학과 불교의 융합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기설에도 밝은 승려였다.

그는 불교의 불성설과 유학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이 일치한다고 말하고 “유와 불은

손이 둘로 나누어진 것과 같고 수레에 바퀴가 둘이 달린 것과 같다”고 갈파하였다.

 

이도 현실적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지에서 발현된 논리일 것이다.

앞 시대 함허스님이 제시한 〈현정론〉의 유파라 볼 수 있으나 뒷 시기에는 조금 틀을

달리하여 휴정스님으로 계승되었다.

어쨌든 도첩제에 따라 정기적으로 3년마다 한 차례씩 시험을 보아 15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 승과에 합격한 승려가 4천여명에 이르렀으며 30명이라는 정원 규정은 아예 무시되었다.

여기에는 휴정·유정이 끼어 있어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승과에 합격한 스님은 신역을 면제받는 대신 베 30필을 내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제대로

내는 사람이 드물어 예조에서 골치를 앓았다.

수령들은 사찰을 감시할 수 없었으며 선비들도 기가 꺾였다.

정국 운영의 실권자인 윤원형도 문정왕후의 불교진흥책에 동조하여 사림의 반감을 샀고

뒷날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보우스님은 문정왕후의 뜻에 따라 재상 대우를 받으며 추종세력을 거느렸으나 현실의 당면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불교계 내부의 여론에 시달렸다.

그는 늘 산사로 돌아가 조용한 수도생활을 즐기려 하였다.

한 승려가 그를 제거하려고 그의 비리를 적은 문서를 들고 성균관에 들어가 소동을 피운

적이 있다. 이도 선종 교종의 승려들이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의 비리는 유언비어성이 강하였다.

때로는 문정왕후를 끼고 잠자리에서 놀아났다는 말들이 퍼지기도 하였다.

 

이러저러한 갈등과 공격에 시달린 보우스님은 1555년 8년간 맡았던 봉은사 주지직과

판사직을 내놓고 청평사로 물러가 살았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부름으로 5년만에 서울로 돌아와 다시 선종판사직을 맡았다.

그러나 곧바로 중상모략에 얽혀 세심정으로 쫓겨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불려 나왔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을 한강가에 있는 광주 땅 선능 동쪽으로 옮기고 봉은사도 그 근처로

옮겼다. 봉은사는 이때부터 막대한 재산을 끌어안고 승려들이 득실거렸으며 보우스님도

이 절에서 계속 살았다.

1565년 문정왕후는 사월 초파일을 하루 앞두고 명종에게 불교를 보호하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명종은 이 유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곧바로 회암사에서 벌이기로 예정되었던 불사도 중지시켰다.

사림들은 때를 놓칠세라 봄논에 개구리떼처럼 왕왕거리며 일어났다.

전국의 유생들이 나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선교 양종을 없애고 보우스님을 죽이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6개월 동안 1천여건이 넘을 정도로 나라가 시끌벅적하였다.

공직을 박탈당한 보우스님은 깊은 산골인 한계산 설악사로 도망쳤지만 한 승려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왔다.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이 일었으나 율곡 이이가 조목조목 사리를 들어 만류해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처벌을 내렸다.

이이는 비록 사림의 종주로 추대되었으나 불교 관련의 일로 평생 시달렸다.

이이는 19세에 어머니를 잃은 뒤 세상에 대한 허무감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삭발하였다 한다.

그런 뒤 동인 서인으로 갈라져 당쟁을 벌일 때 “전생에는 김시습이었고 금세에는 가낭선일세”라

는 시구를 지었다.

김시습은 불교에 심취한 떠돌이 거사였고 가낭선은 한 때 출가한 중국의 문인이었다.

자신을 이들에 비유한 탓으로 불교도라는 지탄을 받았다.

 

유학자, 보우스님 살해

 

보우스님이 제주도에 이르자 조정의 동정을 간파한 제주목사 변협이 불법으로 죽여버렸다.

변협은 이이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비호를 무시하고 죽였던 것이다.

조정의 벼슬아치와 성균관의 유생들은 보우스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베풀었다.

명종은 마침내 양종을 철폐하고 승과 시험을 없앴으며 도첩제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15년 동안 기세를 올렸던 불교 중흥정책은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보우스님은 한쪽에서는 성인으로 추앙을 받고 한쪽으로는 요승으로 지탄을 받았다.

두 가지 극단적인 평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불교계의 비리를 제거하거나 중흥책을 추진하지 못했고 많은 제자를 길러내지도 못하였다.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불교진흥운동을 펴지 못하고 문정왕후에 업혀 피동적으로 끌려 다녔

다는 한계를 지녔다. 그러나 어찌 이를 보우스님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사림들의 득세와 편견에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문정왕후는 승과를 부활시킨 공로자였다.

한데 이를 기회로 하여 불교계는 자정 노력을 기울여 비리를 척결하지 않고 인재를 기르지

못하여 좌절하고 말았다.

 

한편 유학세력은 불교를 이단으로 몰기보다 민중신앙으로 키우고 도첩제를 바르게 시행하여

국가에 유익한 방향으로 유도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아무튼 불교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보기를 들면 선조의 왕비 박씨가 정업원의 비구니를 금강산에 보내 불사를 벌이게

했는데 벼슬아치들이 이 비구니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정업원을 아주 폐지하는 빌미로

삼으려 하였다. 이렇게 왕비마저 견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 속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국불교의 한 전통을 수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