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호국불교의 전통 | ||
유린당한 조선 … 중생위해 일어서라 |
문정왕후가 죽은 뒤 승과가 폐지되고 승직이 박탈되자 스님들은
한탄을 토해내며 흩어져 갔으며 스님의 도성출입은 다시 금지되었다.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져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한 달이 못되어
서울로 육박하였다. 선조는 허겁지겁 북쪽으로 달아났다.
의주의 행재소에 있던 선조는 다급한 나머지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휴정스님을
불러 올렸다. 스님은 이 무렵 서산대사로 널리 통하면서 명망이 높았다.
그가 승과에 합격한 뒤 보우스님의 뒤를 이어 판교종사와 판선종사를 겸직하기도
하였으며 봉은사 주지를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학자와의 마찰을 피해 승직을 사퇴하고 금강산 묘향산 등지로
다니며 제자를 기르는 데 진력하였다.
승병의 궐기 선조는 간곡한 말로 스님에게 승병을 모집하라고 일렀다.
휴정스님은 승병에게도 전공을 세우면 일반 벼슬아치들처럼 품계를 주라는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의하였다.
그는 여기저기에 격문을 보내 승병 1천 5백여명을 모았다.
그는 제자 의엄스님(義嚴)에게 관군과 합동작전을 벌이라고 지시하고 강원도
지방은 유정스님(維政)에게, 전라도 지방은 처영스님(處英)에게 맡겼다.
유정스님은 강원도에서 1천여명을 모집해 명군에 합세하였고, 처영스님은 지리산
에서 거병하여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승병은 초기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 보다는 경비를 맡거나 성 쌓는 일, 짐 나르
는 일을 주로 맡았다. 의병들이 일어나 반격전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조헌은 고향인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공주에서 영규스님(靈圭)이 승병 1천여명을 이끌고 조헌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영규스님은 휴정스님의 제자로 공주의 청련암에 머물고 있었다.
조일전쟁에서 승병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영규스님의 부대가 최초이다.
승병이 포함된 7천여명은 일본군이 차지한 청주성을 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평소에 무술로 단련한 승병이 용감하게 앞장을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조헌은 영규스님의 의견에 따라 전라감사 권율에게 편지를 보내 1592년 8월 17일
금산성 공격을 결정하였음을 알리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조헌은 권율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영규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산성을
섣불리 공격하였다. 조헌이 적군의 칼날에 쓰러지자 휘하 장수가 영규스님에게 후퇴를
권유하였으나 뿌리치고 분전하다가 죽었다.
이 전투에서 7백명이 죽었으며 승병 다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중들 사이에 이 전투와 관련해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조헌이 들판을 결전장소로 결정하자 영규스님는 병법에 맞지 않는 곳이니 산등성이로
옮기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헌은 속내로 자신이 순절하면 이곳이 사당을 지을
명당터라고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한다.
영규스님는 “젊은 선비와 함께 전투를 벌여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영규스님는 조헌에 가려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도총섭의 직함을 받은 휴정스님과 승병장 유정스님이 이끄는 승병은 평양전투에서
명군과 합동작전을 벌였다. 서울 수복작전에 휴정스님은 73세의 노령이어서 묘향산으로
물러갔으나 유정스님이 대신하여 참여하였다.
선조는 1593년 10월 서울로 귀환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서울로 들어올 때 많은 벼슬아치들이 배행하였는데 휴정스님은 묘향산에서
나와 유정스님과 함께 임금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대열에 끼어 말을 타고 들어왔다.
바로 승군이 임금의 호위병으로 환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 뒤 휴정스님은 도총섭을 유정스님에게 넘겨주고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갔으며 유정스님
은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선교양종판사를 제수받았다.
이때에도 유학자들은 승직을 부활한다고 들고일어났다.
이렇게 총림불교 세력이 호국불교의 기치를 내걸고 참전하고 있을 때 충청도 일대에서는
반란세력이 등장하였다. 일본군들이 남쪽으로 후퇴하였을 때인 1596년 7월 이몽학이 주도
하여 조정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몽학은 조일전쟁 기간 모속관(募粟官)의 직함을 받고 충청도 일대에서 양곡을 모아 관군과
의병에게 보냈는데도 별로 공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는 홍산의 도천사로 들어가 승려 능운을 꾀어 그 곳을 중심으로 승려 수백명과 노비와
유리민을 끌어들였다. 불평불만에 찬 농민과 승려들은 도천사로 모여들었다.
이몽학이 승속(僧俗)장군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봉기하여 홍성 등지를 점령하였으나 관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하였다. 그런 뒤 도천사는 반역의 소굴이라 하여 불태워졌으며 도천사가 있던
홍산현은 강등되어 부여에 소속되었다.
이 사건에 가담한 승려들은 바로 늘 지배세력에 저항하는 당취(黨聚, 땡초)들이었을 것이요
떠돌이였던 사당패(社堂牌) 부류였을 것이다.
유정스님의 외교적 활약
조선은 유정스님을 전쟁의 중재자로 내세웠다.
당시 일본군에는 많은 승려들이 참전하여 참모나 장수로 활동하였으며 선봉장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부대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이라 쓴 깃발을 펄럭이며 진격하였다.
곧 부처의 뜻에 따라 중생제도를 이룩하여 조선을 불국토로 만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를 알고 혀를 내둘렀으나 그 선동성은 강렬하였다.
가토가 남쪽으로 후퇴하여 울산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도원수 권율은 유정스님을 가토에게
파견하였다. 곧 스님을 화의사절로 이용한 것이다.
유정스님은 세 차례나 가토를 만나 여러 사정을 설명하면서 명 나라를 배제하고 당사국 끼리 휴전
회담을 성취시키려 하였다.
이 회담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리는 없었으나 일본군의 2대 장수인 고니시와 가토를 이간시키는
효과를 가져 왔고 가토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이때부터 친분을 쌓았다.
이때 유정스님은 조정에, 첫째 모든 백성을 총동원하여 적을 격퇴할 것,
둘째 화의를 맺어 적을 돌려보내고 나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무장하며 군수와 기계를 준비
해서 적의 내침을 막아야 한다는 유명한 토적보민사소(討賊報民事疏)를 올렸다.
7년전쟁은 끝났으나 수많은 포로들이 일본으로 잡혀갔다.
그 포로의 숫자를 수만명이라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많다고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화의를 진행시키거나 호의를 보일 때 몇 십명 또는 몇 백명 단위로 포로를 돌려보내
주었다. 조정에서는 마침내 1604년 6월 유정스님을 일본에 보냈다.
유정스님은 일본의 실정을 살펴보고 포로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고 무거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정스님이 명망 높은 스님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유정스님은 통신사가 아닌 강화사라는 비공식 특사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다.
유정스님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한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융숭한 대우를 받으며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영원히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일본의 여러 명사를 만났다.
특히 쓰시마의 심부름꾼이었던 겐소(玄蘇), 임제종의 승려인 엔코(圓光元佶), 장군출신의 선승인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 등 고승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유정스님에게 불법을
듣고 글씨를 얻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유정스님은 중생구제를 위해 포로를 송환하는 일에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유정스님은 10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뒤 돌아왔다.
여러 기록에 유정스님이 돌아올 때 포로 3천여명을 직접 데리고 왔다고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지금도 밀양 표충사에 보존되어 있는 그의 비문에 “포로가 된 남녀 3천여명을 찾아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해 표창을 받았다”고 쓰여 있는데 제자들이 과장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돌아온 지 2년 뒤 통신사 여우길이 일본으로 길을 떠날 때 유정스님이 여우길을 통해 엔코,
사이쇼, 겐소에게 친필 편지를 보냈다.
엔코에게는 “나의 본디 소원은 포로를 모두 데리고 오는 것이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
으로 돌아왔소”라 하였고 사이쇼에게는 “장군이 처음에는 돌려보낼 뜻이 있더니 마침 그렇지 못
하여 내가 빈손으로 돌아왔소.
형은 대장군에게 알려 그때에 시행하지 못한 것을 다 돌려보내 식언하지 않도록 하시오”
〈사명대사집〉라고 당부하였다.
유정스님은 중생 구제와 약속 이행을 촉구하면서 포로 송환을 재차 요구하였고 일본은 그 약속에
따라 여우길이 돌아
올 때 1천 5백명을 비롯하여 단계적으로 3천여명을 돌려보냈던 것이다.
다만 유정스님이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했으나 수십명 정도의 포로를 데려 왔을 것이다.
그러니 포로 송환은 그의 공적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조선불교의 새 기운”
민중들은 스님을 활인승(活人僧)으로 추앙해 그의 행적에 관해 무수한 설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일본에 갔을 때 도쿠가와가 항복하는 절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내 무릎은 너희를 위해 꿇지
못한다”고 대답해 기개를 과시하였다 한다.
숯불을 뻘겋게 피워놓고 유정스님에게 불 가운데로 들어가라고 해서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숯불
가까이 다가가자 마른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숯불이 저절로 꺼졌다 한다.
그를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잠을 자게 해 아침에 문을 열자 그는 “왜 방이 이렇게 추우냐”고 호통
쳤다 한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생불로 받들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설화가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박씨부인전〉과 같은 소설에도 담겼다.
유정스님은 승려의 몸으로 이처럼 나라를 위해 충성하였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또 민중들은 휴정스님과 영규스님에 얽힌 설화도 만들어냈다.
불교학자 김동화는 “보우스님 서산 사명은 이조 불교를 새롭게 살리는 거맥이었다.
다시 말하면 문정왕후의 섭정에 의해서 승과의 부활이 없었다면 서산과 사명의 배출은 불가능
하였을 것이며 서산과 사명의 배출이 없었다면 조선 불교는 적막하였을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 지적처럼 휴정스님의 불교 이론 또한 주목 받았다.
그는 유불선 합일사상을 〈선가귀감〉에서 제시하였으나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불교에 있었다.
또 불교에 대해서도 선교일치를 주장하였으나 “법은 일미(一味)이지만 선은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된다”고 갈파하여 선을 우위에 두었다.
관점이 보우스님과 달랐다.
휴정스님은 특별한 불교 이론을 내세웠다기 보다 호국에 관련된 이론을 많이 냈다.
그가 스스로 해인사 부근에서 야로(冶爐)와 화살을 만들기도 하고 무기 개량과 화약제조법
조총사용법 등을 개발하였고 산성 개축에도 관심을 쏟았다.
어쨌든 조일전쟁은 무수한 절이 불타고 불보가 잿더미에 묻혔으나 두 고승을 배출하여
불교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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