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역사

숙종기 민중의 동요

선바우1 2018. 1. 30. 16:14


숙종기 민중의 동요

당취·민중 유학자에 조직적 대항

 

 

17세기 후반기부터 조선 조정은 당쟁의 격화로 분란을 야기하였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자학적 교조성이 더욱 굳어졌으며 이에 바탕한
북벌론(北伐論)이 대두하여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결 양상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병자호란을 야기한 우리나라의 원수요 조선이 부모의 나라로 받들던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완고한 송시열과 그 계열은 정권을 잡고 불교와 무속을 앞 시기보다

강도 높게 탄압하였다.

그 동안 제한적으로 탄압을 벌였던 경우와는 구분될 정도로 양민의 출가를 막고

신도의 절 출입과 보시를 통제하였다.

전염병·흉년·당파싸움…극빈층·도적 증가 “차별없는 미륵세상” 기원…기복불교

접목 숙종도 어릴 때부터 한유(韓愈, 당나라 유학자 출신의 문인 정치가)가 사리

를 배척한 불골표(佛骨表)를 읽고 감동하여 그의 사당을 성균관 옆에 세우라고

지시할 정도로 배불론자였다.

 

그는 불교 배척을 선언하였다.

1676년(숙종 5) 숙종은 청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고 전국의 승병을 동원해 강화도에

돈대(墩臺)를 쌓았다. 이 돈대는 단계적으로 이룩되었으나 남한산성의 축조처럼 거의

스님들의 노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돈대는 결국 19세기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는데 이용되었다.

 

서민·여성 불교귀의 증가

 

1682년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황해 앞 바다에 검은 칠을 한 나무상자가 수없이 떠내려와 조수에 밀려 연안 모래톱에

앉았다. 어부들과 주민들이 나무상자를 열어보니 상자마다 유지로 단단하게 싼 책 두 권

씩이 들어 있었다.

 

보관이 잘 되어 책들은 거의 바닷물에 젖지 않았다.

관가에서 알고 책들을 수집해 서울로 보냈는데 모두 1천권이나 되었다.

그뒤 5∼6년이 지나 금칠을 한 나무 불상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제주목에서는 심상치 않다고 여겨 이를 중앙에 보고하였다.

이것들이 어디서 흘러왔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 일본배가 중국 남쪽에서 불경을 싣고 가다가 난파한 탓으로 조수를 타고 흘러왔을 것이다.

 

두번씩이나 이런 일이 일어나자 선비들은 불교가 중흥할 것이라고 염려하였고 스님들은

 이적(異蹟)이라고 하며 고무되었다.

숙종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교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누그러뜨렸다.

그 보기를 들어보자.

안변 석왕사에는 태조가 손수 쓴 글씨가 보관되어 있었다.

석왕사 스님들이 이것을 돌에 새겨 영구히 보존하고자 하였다.

숙종은 이 글씨를 보고 손수 내력을 써서 내려 주었다.

처음 강경하게 이단 배척을 선언하였던 숙종이 비록 조상의 글씨 내력을 적고 찬양한

글이기는 하나 절 문서에 글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타협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서인지 한 동안 눈치를 살피던 궁중에서 드러내놓고 부처님을 섬겼다.

궁녀들은 궁중에서 공공연하게 불경을 외웠으며 김여천이라는 거사를 끌어들여 궁궐에서 〈

칠성경〉을 낭송하였다. 출가해 나가 사는 여러 궁방(宮房)의 공주 옹주들은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연등회를 열었으며 다달이 시주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서 당시의 여염 풍조를 묘사한 기록을 요약해보자.

“무법천지여서 온 세상 사람이 도첩의 제도가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이 없는 평민이 마음 내키는 대로 비구 비구니 또는 우배새 우바이 되는 것을

조금도 어렵지 않게 여긴다. 아침에는 평민이 되고 저녁에는 거사 처사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죽을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이 절을 목숨 보존하는 소굴로 여기고 머리를

 깎고 모양을 바꾸어서 먹물옷을 입으니 알아볼 수가 없다.

팔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절이 나라에 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무리가 숨는 곳이 되고 그 무리가

어찌나 많은지 호미를 찬 농부나 창을 멘 군졸보다 많다.

밭을 갈지 않고 옷감을 짜지 않아도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하다.

절이 궁궐보다 백 배나 크고 화려하며 금은 보화가 민중의 재산보다 백 배나 많으며 관가에

바치는 것이 조금 있다 하더라도 이는 지방 관장의 개인 재물이 되고 국가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들 가운데 조금 문자를 알면 대사라고 일컬으며 여러 암자에 거처하면서 한평생 동안 한

올의 실도 공납하지 않는 자가 절반이나 된다.

남자 신도인 거사와 여자 신도인 사당도 매우 많다.

나라 안에 가득한 이 무리가 동냥으로 직업을 삼으면서 좋은 옷에 배불리 먹고 지내니 민간에

끼치는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

병역을 도피하고 부역에 나오지 않으면서 평생 한 올의 실도 관아에 바치지 않는다.”

유학자, 불교핍박 가열 이긍익의 지적대로 이런 실정이고 보니 도첩제는 허울만 있을 뿐 사람

\들은 부담스런 군역과 부역을 피하고 관권의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너도나도 절로 들어갔다.

 

절의 공양주나 불목하니가 되어 밥을 얻어먹는 편이 더 편안하고 때로는 만행이나 탁발을

핑계대고 떠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사회는 전반적으로 규범이 느슨해졌으며 불교도들은 차별과 탄압에 저항하였다.

18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실학자 유수원은 오늘날 불교가 역대에서 가장 쇠퇴하였다고

전제하고 불교의 폐단을 〈우서(迂書)〉에서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오늘날 역을 피하려는 무리로 인해 중의 숫자가 많아졌다.

백성의 역이 고르면 저 머리를 깎은 자들은 다투어 환속할 것이 틀림없다.

역대의 제도를 본받아 한 고을마다 숫자를 지정해 사찰과 암자 몇 곳 만을 남겨두고

절마다 몇 명만을 살게 해야 한다.

출가에도 나이 제한을 두어야 하며 도첩제를 실시하고 도첩을 주는 대가를 받을

것이며 마음대로 중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절에 보시로 바친 토지를 일일이 가려내 관가로 귀속시켜야 한다.”

유수원은 불교가 가장 침체된 시기에 이를 더욱 옥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스님의 수가 많은 것은 피역(避役)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 억제 방법을

제시하였다.

 

18세기 후반기에 살았던 실학자 이익은 나라를 좀 먹는 여섯 가지로 노비 제도, 과거

공부, 문벌 팔기, 광대와 무당, 비구와 비구니, 게으름뱅이(遊食者)를 들었다.

그 역시 〈성호사설〉 인사문에서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중들은 부처를

받들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여러 가지 역을 도피할 생각으로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날마다 옥토에서 나는 곡식을 축내는 무리이다.”라고 하였다.

 

출가의 동기는 피역뿐만 아니라 연달아 도는 역질과 흉년에도 원인이 있었다.

1684년 2월, 봄기운과 함께 우역(牛疫)과 역질이 크게 돌았다.

평안도 지방 30개 고을에서 석 달 동안 병들어 죽은 소의 숫자가 4천두 가량 되었으며

차츰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어 남쪽을 중심으로 염병이 휩쓸었다.

염병이 한번 돌면 가을 찬바람을 기다리며 자연 소멸을 바라볼 뿐이었다.

 

1698년에는 흉년과 염병이 겹쳐 일어났으며 다음해에 호구 대장을 정리해보니 호수는

25만 340호, 인구는 141만 6,300 가량이 줄었다.

 

1708년에는 염병과 홍역이 돌아 마을 폐허로 만들었는데 5년과 8년을 주기로 찾아왔다.

특히 발진성 열병인 홍역은 봄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어린애의 생명을 앗아갔다.

 

한편 정치적 사건도 연달아 일어나 많은 살육을 저질렀다.

이른바 옥사(獄事)라 일컬어지는 정치적 변동은 주기적으로 일어나 서인과 남인, 노

론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 당파가 대결하여 정적들의 씨를 말렸다.

이런 정치적 사건은 더욱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따라서 새로운 사회세력을

만들어냈다.

더욱이 전국적으로 도둑떼가 들끓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할 정도로 조직적이었다.

이들도 변혁세력의 주변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소유 토지도 없고 원당도 아닌 일반 사암의 경우, 먹고 살아갈 자생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특히 흉년과 역질이 돌 때에 절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였다.

18세기 이후 양반 지식인들은 몰락하여 서당 훈장이나 때로는 사주 관상, 때로는

점술가(占術家), 때로는 도시의 강담사(講談師, 이야기꾼)로 전락하여 생계를 꾸렸다.

절도 이런 새로운 사회 분위기에 휩쓸렸다.

불공으로만 사찰 수입의 원천으로 삼지 않고 작명 사주 관상를 보아주거나 때로는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과 부적을 돌리거나 점을 쳐주었던 것이다.

 

고려 중기부터 왕실에서 때때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가졌고 그 뒤 일반 사찰에서도

사주 관상을 보아주는 경우가 있었으나 가난한 절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생계 수단으로

삼은 것은 조선 후기였던 것이다.

이는 기복불교와 점찰불교의 접목이었다.

또 무속적 굿과 독경이 절에 유입되어 결합한 현상도 보였다.

 

한편 무학스님이 지었다는 비기를 비롯해 〈토정비결〉(土亭秘訣) 〈정감록〉(鄭鑑錄)

등 비기류의 유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들은 일정하게 민간신앙과 변혁사상이 결합하여 유행을 탔는데 미륵신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일부 사찰, 생계위해 ‘占’ 시대 상황이 어려울수록 민간과 불가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다.

 

신라 말기에 미륵신앙이 민간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은 상황과 비슷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가난하고 작은 사찰에서 미륵경을 자주 찍어 돌렸다.

신도들은 미륵경을 봉송하면서 미래불인 미륵이 현세에 도래하여 빈부와 신분의 차별이

없고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자가 없는 이상세계가 열릴 것을 열망하였다.

미륵은 민중들이 열망하는 일종의 ‘메시아’였다.

일부 거사패는 미륵신앙을 부추겨 민심을 충동질하였다.

 

양주 땅에 근거를 튼 여환은 ”석가의 시대는 가고 미륵의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떠들며

변혁을 도모하였다.

작은 암자마다 미륵불을 조성하기에 바빴고 미륵불을 조성한 금산사 법주사 관촉사는 기도

하려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 무렵 ‘땡추’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바쁘게 돌아다니며 무리를 모았다.

땡추는 한자어인 ‘당취’(黨聚)의 전음이라고 하는데 “떼지어 모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작은 암자나 도시 주변의 절을 중심으로 모여 여염에 출몰하였으며 비밀 조직을

만들어 처사 거사와 손을 잡았다.

조직원들은 동료가 어려운 일에 처하면 도와주고 압제를 받으면 복수하는 등 단결력을

과시하였다. 땡추들은 산적이나 명화적처럼 산과 도시를 넘나들면서 자기네 조직원끼리

알아볼 수 있는 옷이나 암호 따위의 신표(信標)를 지녔다.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변혁세력과 손을 잡고 때로는 민심을 충동하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