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불교 위기…지배세력 타협 ‘모색’ | ||
영조말 위경 등장과 원당 금지 |
역모를 꾀한 스님의 조직과 강령-활동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기록을 종합해보면 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 사례들이 몇 가지 나타난다. 18세기에 일어난 사건에 한해 그 보기를 두 가지 들어보자. 변혁적 정치운동 누그러뜨리는 의도 깔려 주자학적 교조성 강화‘어용승려’ 자구책 1767년(숙종 23) 이영창 등의 역모사실이 발각되었다. 서자인 이영창은 명나라가 망한 뒤 망명해온 운부(雲浮)스님이 금강산에 있는데 상천통문(上天通文) 하찰지리(下察地理) 중관인사(中觀人事)하는 옛 제갈공명과 같은 인재라고 선전하였다. 운부스님의 제자 1백여명이 전국에 퍼져 있는데 의적 장길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진인 정씨와 최씨가 가담했다고 하였다. 먼저 조선에 정씨 왕국을 세우고 청국을 쳐서 천자국을 세울 것이라 호언하였다. 이 사건이 고변자에 의해 발각되자 조정에서는 운부스님과 장길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두 사람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이 일로 하여 승려를 수색하느라 절마다 큰 소동이 일어났고 그 뒤 승려에 대한 수색이 강화되어 승려들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승려-의적 연결 역모 꾀해 1728년(영조 4) 이인좌 주도의 변란이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인좌가 충청도에서 거사하자 이에 호응한 지리산 세력이 동쪽의 대원사 골짜기와 쌍계사 연곡사에서 출몰하였다. 호남 일대에도 작은 규모의 봉기군이 출몰하였으며 지리산 세력으로 보이는 수천명이 순창 영취사에 모여 서울로 진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런데 관군 쪽에서는 이들 지리산 세력의 두목을 대유(大有)스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대유스님은 수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이인좌가 잡힌 뒤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지리산 세력의 활동은 계속 되었다. 이런 모습은 19세기 들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어쨌든 이 시기 우리에게 당시의 여러 실상을 시사적으로 알려주는 증거물이 있다. 창녕 화왕산에 있는 관룡사(觀龍寺)는 밀양의 표충사와 이웃해 있다. 이 절은 표충사와 함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받드는 법손들이 주석하고 있었다. 이 절에서 불설상법멸의경(佛說像法滅義經)을 간행하였는데 그 개간 연대는 1735년(영조 11)으로 기재 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 ‘불설’이라 붙여 부처님의 원시 경전처럼 그 설자(說者)를 밝혔으나 팔만대장경 에도 수록되지 않은 위경(僞經)이었다. 위경은 인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더러 보이나 우리 나라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궁예가 만들었다는 불경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 위경은 단권의 넉 장으로 이루어졌다. 세존이 열반할 때에 많은 보살들 앞에서 말씀하였다고 내걸고 몇 단계로 나누어 설파하였다. 그 첫 단계는 말세의 사정을 말한 것으로 “내 열반한 뒤 우리 법이 멸하려고 할 적에 악마가 사문(沙門)에 일어나서 우리 도를 어지럽혀 속세의 의상을 입으면서 가사를 오색의 의복으로 즐겨 만들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서 사냥을 하여 고기를 팔며, 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으면서 들판을 불태우며 중생을 살해하 면서 자비가 거의 없다. 다른 이의 자만을 비방하면서 스스로 그 법을 나무라며 늘 악업을 지어 끝내 아비지옥으로 떨어져, 천겁을 지나도록 고뇌를 받아 길이 헤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말세의 타락으로 그 징벌을 받게 됨을 말하였다. 둘째 단계로 “임금이 일어나서 승병을 머물게 하며 참된 승려는 들로 내려가고 외도를 하는 자가 입산하여 술 마시고 법을 강술하며 계율을 받지 않고 법을 팔아 살아가며, 스님은 부처를 공경치 않고 속인은 스님을 공경치 않으며 불법은 쇠망하고 유도(儒道)가 치성하며 인과를 믿지 않고 즐겨 외전을 외우며 하늘을 능멸 하고 임금을 매도하며 신심과 사도가 도착(倒着)되어 제천(諸天)이 울도다. 풍우가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풍성하지 못하며 벌레가 곡식을 먹어 사람들이 주려 많이 죽으며 거의가 악인 으로 굴러 떨어져 길이 좋은 인연을 끊는다”라 하였다. 말세 타락의 결과, 임금이 참된 승려를 대우하지 않아 재앙이 닥친다는 것이다. 말세 괴변 다룬‘위경’등장 셋째 단계로 “인물과 만물에 한꺼번에 괴변이 일어나 말법의 시기마다 40에 머리가 희기도 하고 30에 머리 가 희기도 하고 20에 머리가 희기도 하고 10에 머리가 희기도 하며 7년의 풍재(風災)로 땅이 말라 버리며 7년 수재로 유정(有情) 만물이 물에 잠겨 모조리 문드러진다”고 하였다. 말세에 괴변과 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 뒤 보살들이 “세존이시어, 말세에 중생이 어찌 이 고난을 면하겠나이까”라고 울부짖자 “중생이 이 어려 움을 면하려면 3종의 선인을 지어야 하니 무엇이뇨. 하나는 참선이요 둘은 염불이요 셋은 자선이니 이 3종 선근(善根)에 인연한 자는 신력이 있어 곧바로 삼승산에서 쾌락을 받아 세세생생 길이 3재를 겪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성인 양거왕(梁居王)이 탄강하여 용화대회를 열고 중생을 제도하여 필경 성불한다고 갈파하였다. 이때에는 천하가 태평하고 풍년이 연달아 들며 사람들이 8만 4천세를 살며 키가 60척이 되며 의식과 행장에 금은 유리 옥돌 호박 진주 등 칠보의 이익을 받는다고 하였다. 마지막 단계로 “만약 이 인생이 좋은 인연을 닦지 않고 늘 악행을 저질러 인과를 믿지 않으며 부처를 빌어 하늘을 능멸하며 법을 해쳐 하늘을 비방하며 두 어버이에 효도하지 않고 임금을 속여 피역하며 스승을 천하게 여겨 자만하는 자는 이 재난을 만나 모조리 아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이 몇 단계의 설명은 정교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말세의 타락을 설명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 상황 곧 불교의 타락과 유교의 번성을 조합하다 보니 그 논리적 괴리를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이다. 미륵하생의 용화도래를 말하면서 조정의 현실 정책과 결부시키다보니 미륵이 하생하여도 결국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죄를 짓는 중생이 있다고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미륵하생경이나 미륵상불경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다. 이는 미륵경의 해설이 아니라 이를 빙자한 위경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위경을 만들었을까. 이를 만든 이들은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법손으로 표충사와 연계관계에 있는 절에 주석하는 승려들이다. 끝에 적은 명부를 보면 대덕 가선 통정 승통 판사 등의 직함이 보인다. ‘현실부정 지양’논리 쉽게 말하면 호국불교 계통의 어용 승려들이 만들고 간행하였음을 알려준다. 그 목적은 불교의 타락상과 불교 변혁세력의 준동, 미륵신앙을 통한 현실 부정의 사회 분위기, 유교의 횡포와 외전의 유행 등 정통불교의 위기의식을 지양하고 지배세력과 일정한 타협을 모색한 논리전개 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경을 간행한 뒤 두 가지 일을 벌인 것만 보아도 이를 추정할 수 있다. 이 책을 간행한 3년 뒤 관룡사의 실질적 지도자로 보이는 연초(演初)스님의 노력으로 유정스님의 사당을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휴정·영규스님을 합향시키고 표충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국가의 공인을 받고 지원을 얻어냈던 것이다. 이어 그 1년 뒤에는 유정스님의 행적과 글을 모은 〈분충서난록〉을 편찬 간행하였는데 관아의 지원과 중앙 정계의 협조가 있었다. 한편 삼종 선근으로 참선 염불과 함께 자선을 든 것도 불교 재정수입의 기초가 되는 보시를 염두에 둔 설정이 라 볼 수 있다. 또 나쁜 짓의 하나로 ”임금을 속이고 피역한다”는 구절을 깔아 놓은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할 것이다. 끝에 주상삼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壽萬歲)라 하여 임금과 왕대비 왕비의 축수를 위해 간행하였음을 밝혀 두었다. 또 연초스님을 유학자 출신의 문장가 신유한을 ‘방외(方外)의 벗’으로 사귀어 〈분충서난록〉의 편집 을 맡기기도 하고 〈관룡사사적〉을 만들게도 하였다. 신유한이 정계의 거물은 아니나 그 다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휴정스님의 〈선가귀감〉이 논리적으로 유불선 삼교의 타협을 모색하였다면 이 위경은 당시 불교계의 현실을 인용하여 하나의 정치적 제스처 또는 이미지 조작으로 볼 수 있겠다. 다시 말해 불교도의 변혁적 정치운동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뜻이다. 주자학적 교조성이 강화되어 불교의 탄압이 가중되지 않도록 작용하려는 몸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원당에 기대 살고 있는 어용 승려들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벌인 피나는 자구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위경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간행하여 신도들에게 배포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할 것이다. 경전 뒷전 사주관상 흥행 영조의 말년에 승려들의 위기의식는 현실로 나타났다. 1758년(영조 34) 황해도의 한 무당이 생불이라고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받들었 으며 주변의 무당들까지 줄줄이 따랐다. 이 보고를 받은 영조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어사 이경옥을 보내 실태를 조사하고 무당의 머리를 베어 이 무렵에는 종전보다 더 승려와 무속이 끈끈하게 결합하여 동류의식을 보였다. 무당들은 신포세(神布稅)를 바치면서도 승려와 마찬가지로 도성 출입을 금지당하였다. 이들은 불경은 뒷전이고 점치고 사주 관상 작명 보는 책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영조는 근검절약을 권장하고 사치를 막아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서민 경제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그 일환으로 궁중의 가체(加 )를 금지시키고 금주령을 발동하였다. 영조는 이와 함께 왕릉 근처의 사찰 창건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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