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서석지
연못이 마당을 뒤덮은 ‘조선 3대 민가 정원’
흙담 너머 은행나무는 400년전 일을 기억할까
![]() |
토담의 남쪽 모서리에 서 있는 거대한 은행나무. 400년 된 고목으로 암나무다. |
마을 전체를 정원으로 삼은 이가 있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 석문 정영방이다.
그는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그곳이 영양 입암면 연당리다. 그는 마을 들입에 솟아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를 석문이라
이름 짓고 외원이라 했다.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인 터에 정자와 연못으로 작은 정원을
꾸미고 내원이라 했다. 풍류의 스케일이 크다.
그것은, 은거하였으나 속에 감추어 둔 야심과 포부의 크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정영방 선생의 내원 서석지. 왼쪽이 경정, 오른쪽이 주일재, 사각의 단이 사우단이다. |
◆영양 서석지에서…
선생의 고향은 예천이다. 어린 시절 우복 정경세의 문하생으로 수학한 퇴계학파의
문인이었다. 이후 영양의 연당리에 터를 잡은 선생은 초당을 짓고 살면서 경관과
환경을 따져 정원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근 10년, 그리고 1636년경 주거공간인
수직사, 서재인 주일재, 정자인 경정, 그리고 연못인 서석지로 이루어진 자신의
별서정원이자 내원을 완성한다.
통칭 서석지로 불리는 정영방의 내원은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정원으로 꼽힌다.
연당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낮은 흙담 너머에서 솟아오른 엄청난 은행나무와
맞닥뜨린다. 서석지와 함께 400년 넘게 이곳에 서 있는 나무는 선생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이웃해 있어야 열매를 맺는
다는데, 주변 어디에도 짝이 뵈지 않는다. 그러나 가을이면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호젓한 장관이라니, 연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짝이라는 소문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경내에 들어서면 정원 공간이 눈에 잡힌다. 공간을 둘러싼 담은 낮고 다양한
수목들에 가려져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연못은 마당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평지에 연못을 파서 물을 들이고 돌을 놓고 연을 심었다.
북쪽에는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이라 했다.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를,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인 ‘토예거’를 내었다. 연못 안에는 크고 작은 돌을 놓았다.
서석군’이다. 서석지 이름은 이 돌들에서 왔다.
서석은 연못 조성 당시 땅속에서 발굴된 것인데, 물 위로 드러난 돌이 60여 개,
잠긴 돌이 30여 개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60여 개라니 오랜 세월 균열되고
쪼개져 그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
이 서석들 중 19개에는 이름이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선유석, 선계로 가는 다리 통진교, 바둑판 같은 돌 기평석, 바둑
구경하다가 도끼자루 썩는다는 난가암, 읍청거로 들어온 물을 갈라 퍼지게 하는
분수석, 용이 누워 있는 듯한 와룡암, 구름이 떠 있는 듯한 상운석, 명예를 절로
끌어들이는 상경석, 나비와 희롱하는 희접암, 꽃과 향초 같은 화예석, 갓끈 씻기
알맞은 탁영반, 고운 눈이 흩날리는 쇄설강, 학이 구름을 머금은 봉운석,
낚싯줄을 드리울 만한 수륜석, 물고기 형상의 어상석, 물결 사이에 떨어진 별
같은 낙성석,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관란석, 하늘과 어우러지는 촛불바위
조천촉, 옥으로 만든 자 같은 바위 옥계척. 각양각색의 이름만큼 뜻도 흥미롭다.
이 중 와룡암은 제갈양의 별명인 와룡 선생을 빗대었다고도 하는데 ‘세상으로부터
은거하였으나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뜻이란다.
서석지에 담긴 모든 세계는 이 정원의 주인이 품고 있었던 인생관, 가치관, 철학,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석지의 입수로인 읍청거와 서석들
연당리 석불 좌상.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서석지의 은근한 과학
서석지의 입수구인 읍청거는 맑은 물이 뜨는 도랑이란 뜻이다.
배수구인 토예거는 더러움을 토해낸다는 뜻이다. 입수구와 배수구는 물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각선상에 위치한다. 입수구는 훤히 드러나 있고 배수구는
쉬이 뵈지 않는데, 들어오는 물을 보는 것은 좋으나 나가는 물은 안 보이는 것이
좋다는 설 때문이다.
또한 입수량을 보며 침수를 가늠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읍청거는 연못 수면과
낙차가 있다. 물은 떨어지면서 미니 폭포가 되고 분수석에서 갈라져 귀를 울리니
시각적, 청각적 미감을 부여한 것이다. 배수구는 바닥 높이가 연못의 희망 수위에
맞추어져 있다. 수위가 높아지면 자연히 배수가 된다. 이러한 입수와 배수를
통해 서석들은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묘한 정취를 만들어 내었다.
지금 읍청거와 토예거는 바싹 말라 있다. 물은 주일재 뒤 동네 안길 옆 도랑에서
흘러들어 왔었다. 그러나 도로가 포장되면서 콘크리트 하수관이 매설되자 암거
수로가 차단되어 물길이 끊어졌다.
비가 올 때만 이들은 원래의 모습으로 젖는다. 그렇지만 연못에는 물이 고여 있다.
희한하게도 사우단 아래와 서석들 사이 3~4곳에서 지하수가 솟아난다.
◆경정과 주일재
정자인 경정은 대청과 2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에 앉아 서석지를 바라
보면 정자는 물속에 선 듯하다. 처음에는 낮은 담 너머로 멀리 1㎞ 넘게 세상이
보였다는데, 지금은 불쑥 자란 나무들이 병풍이 되었다.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경을 받들었다 한다.
주일재(主一齋)는 선생의 서재였다.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이다.
경정보다 먼저 지었으니 학문하는 자의 뜻이 보인다.
또한 사우단의 수목들이 연지를 가리니, 꽃 피는 시절에도 헐벗은 시절에도
선비의 기상과 지조는 흔들림 없길 바라는 마음인가 한다.
7월, 연꽃 피는 시절이다.
◆연당리 석불 좌상
연당마을 앞에는 청기천이 흐른다. 천변에는 수령 약 2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매년 동제를 올리는 당산목이라 한다.
이 나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돌부처 한 분이 금줄을 두르고 앉아
계신다. 연당리 석불좌상이다. 몸은 깨어지고 얼굴은 문드러졌지만 3단의
대좌와 연화문과 구름무늬가 새겨진 광배를 모두 갖춘 분이시다.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 왼손은 둥근 약 그릇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로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하여 홀로 이곳에 앉아 계신가, 청기천 물길을 바라보며. 병도 재앙도
저 물길 따라 떠나가라는 뜻인가.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중앙 고속도로 남안동 IC로 나간다. 안동방향 5번 국도로 가다 34번 국도 영덕,
진보 방향으로 간 후 영양방향 31번 국도로 간다. 입암 시가지를 지나 입암교
삼거리에서 좌회전, 선바위 관광지구 지나 조금 가면 왼쪽 도로 연당리 석불
좌상이 있고, 오른쪽에 연당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출처 : 영남일보.
'전통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석지의 은행나무 (0) | 2018.01.15 |
---|---|
전통정원의 재해석 <벤치마킹-영양 서석지> (0) | 2018.01.15 |
동래인 정행과 안동 송천동 모감주나무 (0) | 2018.01.15 |
[스크랩] 영양 서석지-2 (2006.10.19.) (0) | 2018.01.15 |
영양 서석지와 봉감 모전오층석탑 (0) | 2018.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