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

폼페이 최후의날

선바우1 2018. 1. 17. 17:47




폼페이 최후의날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뒤덮는 버섯구름이솟아올랐다



베수비오산 분화구



단 하루만에 대도시 폼페이를 5m 두께의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사람들은 화산재안에 공동(아무것도없이 빈것)으로 남아있었다



구조작업을 지휘하던 로마병사들
구조돼었던 폼페이시민들은 독가스에질식돼 모두죽고 말았다



잿더미를 걷어낸 폼페이 중심모습






대형원형극장 원형경기장
















폼페이는지금도 관광객들의발길이 끊이지않는
인류문화사의 소중한 유적지이다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쳤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꾸며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오듯 쏟아졌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새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명 중 2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로마 병사들,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 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스 산기슭에 세워진 헤르쿨레늄도 똑같은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두 도시는 서로 다르게 파괴되었다. 헤르쿨레늄에는 화산재와 비,

    용암이 뒤섞인 진흙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려 20m 두께로 덮여 도시를 영원히 잠재웠다. 폼페이는 이와 달랐다.

    흙탕물 대신 잿가루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 유황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폼페이는 AC 1세기 인구 2만이르는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로서 로마귀족및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였다
    폼페이는 수도관을 이용하여 집집마다 수돗물이 공급될정도로 활기에넘쳤고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나타내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폼페이는 79년여름 어느날 삽시간에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리므로

    그때생활상이 그대로 17세기동안 보전되어있다

    초기에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나폴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중심지로 번성했고 많은사람이 살고있어 인명피해가 컸다는데

    영국의소설가 에드워드리턴은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그린 [폼페이 최후의날]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1700년이나 흐른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모습이 하나씩 드러날때마다 벌린입을 다물지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한채로 발견되었고

    반쯤구워진빵이 발굴되기도했다

    화산재속에 묻혔던 인간이나 동물의시체는 오랜세월에 썩어 없어지고 화산재안에

    공동(아무것도없이 빈것)으로 남아있었다 이 공동에석고를 주입한다음 화산재를 제거하니

    고통의흔적이 생생한 당시모습의석고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모습으로 굳어져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전에 힘껏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 어떤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채 돌더미에 깔려있었다
    어느집 문턱에서는 젊은여자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있었다 

    폼페이에는 호텔 마구간 피자집 빵집 음식점 선술집 바가 있었고 공중목욕탕 시설이잘된

    사우나 대형원형극장 원형경기장 시장등 각종시설들이 발굴되였고 포장도로와

     하수로 시설이 되여있다

    1709년 이탈리아중부 서해안에 자리잡은 베수비오산서쪽 레지나마을의 수도원뜰에서

    우물을파던일꾼이 대리석조각을하나 캐냈다

    1738년 4월봄날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밭을갈던 농부가 옛날에쓰인수도관을 캐냈다
    땅밑에는 옛도시가 묻혀있다는 추측이 나오기시작했다
    당시 나폴리의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스산 기슭을 파헤쳤다

    알쿠비에르는 폭약을써서 15m 두께 바위를뚫고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

    이라고새겨진 돌을발견했다
    베수비오스화산이 터졌을때 용암에파묻힌 1700년전 로마제국의도시

    헤르쿨레늄을 찾아냈던것이다

    1748년 4월 1일
    나폴리의왕 샤를르의명령으로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산 기슭의 또다른곳을 파헤치기

    시작하여 6일 라틴어가 새겨진 돌기둥들이며 프레스코 벽화가그려진 돌벽을 발견했다

    19일 처음으로
    사람의주검이 발굴되었고 얼마후 원형극장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도시가 어떤도시인지는 알려지지 않은채 보물찾기에만 혈안이된 샤를르왕은

    함부로 이곳저곳을 파헤치게 함으로써 귀중한 문화유적을 파괴했다

    1755년 6월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소 플리니우스 서한집"을 읽어 내려가던 중

    그 이름모를 지하도시가 폼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폼페이는 지금도 발굴되고있는 중이다
    자그마치 400년동안의 엄청난고고학적 작업이다
    폼페이는 비록 화산폭발로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덕분에 고대의모습

    그대로 현재에부활한 현장이다

    폼페이는지금도 관광객들의발길이 끊이지않는 인류문화사의 소중한 유적지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진귀한유적을 볼수있는것은 참혹한 대재앙으로 기록된

    베수비오화산 폭발덕분이다


           

     

     [폼페이 최후의날]

    이 현장을 생생하게 표현한것이바로
    카를브률로프(1799~1852)가그린 "폼페이 최후의날"이다
    19세기 러시아 아카데미 미술을대표하는 카를 브률로프는1827년에
    폼페이를방문한뒤 6년동안 사료를뒤져가며 작품을구상했다

    그리고 3년의 긴 제작기간을거쳐
    가로5m 세로4m의 엄청난대작을 완성해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폼페이 최후의날"이 발표됐을당시
    이탈리아의 평론가들은 33세의젊은 브률로프를 서양미술사의 대가인
    루벤스 렘브란트에 비교해가며 극찬을 아끼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