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酒詩可停 술이 없으면 시도 내키지 않고
無詩酒可斥 시가 없으면 술도 시들해
詩酒皆所嗜 시와 술이 모두 좋으니
相値兩相得 서로 걸맞고 서로 있어야 하네
信手書一句 손가는 대로 시 한 구 짓고
信口傾一酌 입 당기는 대로 술 한 잔 마셨지
- 「우연히 읊다」
年已涉縱心 나이 벌써 일흔을 넘었으며
位亦登台司 벼슬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始可放雕篆 이제는 시 짓기를 버릴 만도 하건만
胡爲不能辭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暮嘯如鳶鴟 밤에도 부엉이처럼 읊노라
- 「시벽(詩癖)」
#주변에 미친 세밀한 눈길
이규보의 시 가운데에는 가족과 주변 사물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대상에 대한 애정과 세밀한 관찰의 결과가 담뿍 담겨 있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가족은 물론 무거운 짐을 지고 매를 맞는 소, 거미줄에 걸린 매미, 고양이, 쥐 같은 동물이나 밤이나 햅살 같은 식물 그리고 몽당붓이나 깨진 벼루에게도 고루 향하였는데, 아무래도 오랜 기간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 미친 결과가 아닐까. 밤을 노래한 시에는 ‘밤은 사람에게 유익한 과일인데 밤을 노래한 시가 적어서 짓는다’고 창작 동기를 밝혀 놓기도 하였다.
葉生朱夏候 잎은 여름철에 돋고
實熟素秋時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罅發呀鈴口 방울 틈처럼 쩍 벌어지면
苞重祕玉肌 윤기나는 알밤 감싸고 있네
饋籩兼棗設 제사상에 대추와 함께 올라가고
女贄與榛隨 신부의 폐백에 개암과 함께 놓였네
不但供來客 오는 손님 대접만 하는가
偏工止哭兒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지
- 「율시(栗詩)」
人盜天生物 사람은 하늘이 만든 물건 훔치는데
爾盜人所盜 너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치누나
均爲口腹謀 다 같이 먹고살려 하는 일이니
何獨於汝討 어찌 너만 나무라랴
- 「쥐를 놓아주다」
#역사로 남은 시
천마산에 은거하던 20대의 이규보는 주몽의 사적을 노래한 「동명왕편」 등의 장편 시를 남겼다. 「동명왕편」 서문에서 이규보는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라고 구체적인 창작 동기를 언급하였다. 또한 『구삼국사』의 「동명왕본기」를 주석으로 남겨 놓았으니,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부나마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그의 역사의식 덕분이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면서 지은, 살 때보다 팔 때 더 받은 집값을 돌려준 노극청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극청천(盧克淸傳)」이나 나룻배를 타면서 겪은 일을 적은 「주뢰설(舟賂說)」은 청렴과 탐욕으로 대비되는 당대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 경종을 울리려는 생각에서 지은 것이다. 산문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소재로 지은 시들도 이규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동국이상국집』 권3의 주몽 설화를 주제로 한 서사시 「동명왕편」. 『구삼국사』의 내용을 원주로 기록해 놓아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면모를 조금이나마 살필 수 있는 근거가 된다.(사진 제공 : 한국고전번역원)
因論花溪採茶時 화계에서 찻잎 따던 때를 이야기하세
官督家丁無老稚 관리들 집집마다 늙은이 어린이 되는 대로 찾아내어
瘴嶺千重眩手收 높은 봉우리 깊은 골짜기 아슬아슬 손을 뻗어
玉京萬里頳肩致 멀고 먼 서울까지 등짐 지고 날랐다네
此是蒼生膏與肉 이것이 바로 만백성의 고혈이라
臠割萬人方得至 수많은 사람 피땀 흘려 예까지 이르렀네
……
破却千枝供一啜 일천 가지 망가뜨려 차 한 모금 마련했으니
細思此理眞害耳 이 이치 생각하니 참으로 어이없구려
知君異日到諫垣 그대 훗날 간원에 들어가거든
記我詩中微有旨 부디 내 시의 은미한 뜻 기억하게나
焚山燎野禁稅茶 산과 들 불살라 차 공납 금지한다면
唱作南民息肩始 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
- 「손 한장(孫翰長)이 다시 화답하기에 차운하여 기증하다」
▲조선 영조 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이상국집』의 표지로, 표제는 “이상국집(李相國集)”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1241년 완성되어 8월에 간행에 착수하였으나, 이규보는 문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9월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함(李涵)이 시문을 추가하고 「연보」, 「묘지명」 등을 더하여 12월에 53권 14책으로 간행되었다. 1251년에는 손자 이익배(李益培)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중간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는 본은 “국내에는 잃어버린 것을 일본에서 구해와 지금 다시 간행하였다.”는 『성호사설』의 기록에 따르면 영조 때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2천여 수의 시와 왕명을 받아 지은 표전(表箋), 교서(敎書) 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사시 「동명왕편」, 가전체의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 시화 「백운소설」 등이며, 재조대장경 판각 경위를 밝힌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과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간행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는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등 중요한 사실을 전하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번역문을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