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추사 고택

선바우1 2018. 1. 16. 17:30



 추사 고택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수백가지에 이릅니다.

조선 후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네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

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습니다.

또한 문인화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 입니다.

 


 

 

 


 


 


 


 


 


 


 


 


 

 

"그대여,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함성을 들었는가"
금북정맥이 감싸고 있는 내포지방의 보물


예산은 금북정맥 분수령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U자로 감싸고

흐르면서 빚어놓은 널찍한 분지에 터를 잡은 고을이다.
서쪽으론 금북정맥의 맹주인 가야산과 덕숭산이 불쑥 솟아 있으나

전체적으론 골격이 부드러운 편으로, 내포지방의 여느 고을과 마찬

가지로 비산비야의 들판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다.
금북정맥 덕에 제법 수량이 있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있으나 물살의

흐름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한가롭다.
인간이 자연의 영향을 받고 언어와 성격도 그렇게 형성된다는

가설이 옳다면 예산 사람들의 말씨가 느리고 인심이 넉넉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리라.



예산 추사고택


-모란향보다도 더 진한 文字香 그리고 書券氣



예산 기행의 첫 방문지는 추사고택(秋史古宅)이다.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언덕들이 펼쳐진

용산(龍山·94m)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은 

내포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운(書卷氣)이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즉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다는 것이다.


1976년 복원한 80.5평 저택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


조선 후기의 탁월한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내포지방, 그중에서도

예산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추사는 서예를

통해 예술의 정수를 널리 떨쳤다.
또 추사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考釋)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파(白坡) 선사와 논쟁을 벌이며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 집안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

(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명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1720-1758) 때부터

해미에서 현재의 자리인 예산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다.
당시 추사 집안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한양 장동에서

살았을 때인데, 천연두가 유행하여 모친이 용궁리로

내려와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덕숭산 정혜사 뜰에서 내려다본 내포 풍경.


명문가답게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

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나중에 잘 풀리지 않았다.
55세인 1840년(헌종 6)에 풍양조씨의 득세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났다.

그럼에도 월성위가 이 고택을 지을 때 충청도의 53군현이

모두 1칸씩 부조하여 53칸짜리 집을 지었다는 일화는 당시

월성위 집안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는 정적들이 영조에게 한양 장동에 있던 월성위의 집이

너무 크다고 상소하자 이 집을 뜯어다가 건립한 것이라 한다.
현재 추사고택의 총 면적은 80.5평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을 뿐이다.
명문가의 저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이유는 1968년 추사고택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1976년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복원할 때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버린 왜곡된 건축 형태가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사랑채 앞에는 오래 묵은 모란이 눈길을 끄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앞에는 1m 정도 높이의 돌 사각기둥이 있다.
이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의 한 종류

로서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 한다.
그 한쪽 면에 ‘석년(石年)’이라 새겨진 글씨는 추사의 글씨.
그러나 직접 쓴 게 아니라 나중에 집자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예서체 글귀엔 소박한 인생철학


사랑채 큰방에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도 걸려있으나 무엇보다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건 주

련(柱聯)들이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들이 대문 옆, 현관 앞, 기둥, 바람벽

등에 주저리주저리 걸려 있다.
추사고택에서 천천히 이 주련들만 음미해도 그야말로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할 듯하다.
역시 주련 읽는 재미는 빼놓을 수 없다.
다행히(?) 각 시구들을 번역해 놓은 조그만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한문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도 거칠게나마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두가 해동제일의 명필 추사가 남긴 유묵이지만, 이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 고희부처아녀손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예서체 글귀는 유명하다.
해석하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는 뜻.
이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절 71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작이다.
떵떵거리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추사가 인생의 의미는 소박하고 평범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

또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라는글귀도 인기 있다.
그 뜻은 이렇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추사의 묘소는 고택 왼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번잡스러운 석물로 치장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생전에 남긴

글씨를 집자한 비석 하나만 있을 뿐인 묘소는 그의 글씨만큼이

나 깔끔하다.
과천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 추사가 직접 심은 천연기념물 백송


여기서 300m 정도 거리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

사가 손수 심은 나무다.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 종자를 필통에 넣어

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백송(白松)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 빛이

되므로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한반도에서 드물게 자라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그런데, 백송은 세월이 제법 지나야 색이 하얗게 되는데,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서는 색이 변할 때까지 자라기 어렵다고 한다.

추사고택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는 무료. 관리사무소 (041) 332-9111


여행정보

숙식 추사고택 주변에는 숙박시설이 없다.

덕산온천 주변에는 덕산온천관광호텔(041-338-5000),

덕산싸이판대온천(041-338-8862),

덕산스파캐슬(041-330-8000) 등 숙박업소 및 각종

음식점이 많다. 예산읍내의 소복갈비

(041-331-2401)는 소문난 맛집이다.

교통

△서해안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사이에 있어 접근이 수월한 편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나들목→ 32번 국도→ 신암→ 추사고택.

서울→ 경부고속도로→ 천안 나들목→ 21번 국도→ 신암→ 예산

<수도권 기준 2시간30분 소요>

△예산행은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8회(07:00~19:05),

인천종합터미널에서 매일 8회(07:55~18:40), 대전동부터미널에서

매일 27회(07:00~19:10) 운행한다.

△예산→추사고택=예산터미널에서 매일 수시(07:50~21:05) 운행.

30분 소요. 예산터미널 041-333-2921~2

출처 : 조선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