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스크랩] 고산정 이야기

선바우1 2018. 1. 16. 17:31




고산정 이야기(글/윤천근)

 

미학의 비밀

길가에는 절경이 없는 법이다. 무엇 때문인가? 접근

하기가 너무 쉽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 너무 분명하게

노출되어 있는 곳에서는 우리의 감상능력이 신묘한

기능을 수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고, 길이 닦여질 수

있는 평탄한 환경 속에는 우리의 눈을 잡아 끌 수 있는 절벽과 물길의 조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자는 길 가에서 절경을 만날 수 없게 하는 심리적 요

인이고, 후자는 그 자연적 요인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경들은 항용 길 가로부터 어느만큼 비켜서 있게 마련이다.

고산정도 역시 그러하다. 직선거리로 말하자면, 고산정은 길로부터 별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청량산에서 온혜 사이를 달리는 국도가 가송 앞에서 크게 굽어돌 때, 우리의 시선은 가송 쪽의 언덕

에 의해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 어디쯤에 그런 절경이 자리잡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시원하게

뻗은 2차선 국도를 차달려가야 하는 도회적 마음가짐으로는 우리의 시선은 종내 고산정으로부터 비껴나

있게 마련이다.


국도 위에서는 시간의 문법이 작용한다. 분, 초를 다투는 도회적 생활의 다급함과, 목적지에 의해 구속된

우리의 시선은 정면 외에는 어디에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국도 위에서는 감상과 여유는 증발되어 버

리는 것이다.


감상과 여유는 국도로부터 비켜날 때 우리들의 마음 속으로 슬며시 찾아든다. 교행하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길, 우리가 예측할 수 없었던 세상을 겨드랑이 아래에 숨겨두었다가 한번 크게 휘돌때마다 슬며시 펼쳐놓은

굽은 길, 돌덩이와 웅덩이로 크고 작은 요철을 만들어서 잠시 숨을 죽이고서야 방향을 잡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비포장길 같은 데에서는 시간의 의미는 증발되어 버린다.

아무리 용을 써도 단숨에 치달려 나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예 시간과의 싸움은 폐기

하여 버린다. 그 순간 여유가 우리 마음 속으로 찾아들고, 우리는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된다. 시간의 문법에서 자유로워 졌을 때 감상의 문법이 자신의 세상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미학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산정과 그 주변의 절경을 돌아보려면, 우리는 가송의 크게 굽은 길에서 국도를 버리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굽은 길의 동쪽, 가송 마을 표석을 옆에 두고 언덕을 향하여 자르고 들어가는 길은 비좁다.

전망은 어느쪽으로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언덕을 자르고 들어간 길이 그 끝 쯤에서 남으로 휘돌며 언덕

한 쪽을 타고 돌면, 비로소 크게 전망이 열린다. 산들로 뒤덮인 원형의 분지, 그 한 끝을 타고 나가는 낙강의

여유있는 흐름, 분지 안에 점점히 펼쳐진 농지, 농지를 옆으로 끼고 자리잡고 앉은 마을…그리고 낙강의 흐

름을 따라 분지 안으로 우리의 시선이 이동할 때,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있으

니, 고산정 주변의 풍광이 바로 그것이다.


고산정은 그렇게 우리가 2차선 국도를 버리고 슬며시 한쪽으로 비켜서는 순간에 물과 돌로 어우러진 자신

의 미학을 비밀스럽게 펼쳐서 보여준다..

한없이 종요롭고, 한없이 넉넉하며,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광을 고산정은 그렇게 바로 2차선 국도의 한켠에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고산정 주변


태백의 황지로부터 흘러내리는 낙강의 물결은 늘 넉넉하고 늠름하다. 청량산 경내로 들어서면서 낙강은 북에서 남을 향하여 일선으로 청량산의 절벽 한 끝을 타고 오래 흘러내린다. 그리하여 너무나 평범하였던 낙강의 물은 비로소 신선의 품격을 얻는다. 청량산의 발치를 오래 적셔주고, 그 빼어나고 청수한 자연의

빛깔을 얼마쯤 나누어 받은 탓이다.


북에서 남으로, 일선으로 치달리던 청량산이 크게 한 굽이 휘돌면서 동행을 시작하는 곳, 그래서 청량산 발치를 타고 흐르던 낙강도 그 용트림을 따라 한번 비틀

어지며 동행을 준비하는 곳, 그곳이 가송이다. 일선으로 치달리던 산줄기가 몸을 비틀기가 어디 쉬울 것이고, 수직의 가르마를 타고 흘러내리기에 익숙한 강물의 흐름이 단숨에 방향을 바꾸어 내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따라서 가송에 이르면 산줄기는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며 동행을 하기도 하고 서행을 하기도 하며, 또 한 쪽에 떨어져 독산을 이루기도 한다. 가송에 이르면 낙강은 좁은 분지를 만들어내며 동행을 하였다가 서행을

하고, 한참으로 서행한 후에야 다시 남행을 도모한다. 가송에서 산줄기와 강줄기는 태극의 형상으로 한번 크

게 요동을 하였다가 제 방향을 되찾아 도산 쪽으로 남행을 하는 것이다.


청량산의 산줄기와 낙강의 물줄기가 음양으로 뒤섞여 산태극 수태극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곳, 가송은 산줄

기와 물줄기의 기운이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곳이다.

그러니 그곳의 산수가 그저 평범할 수만은 없는 것이 정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가송에서 한바탕 용트림을 하는 산태극 수태극의 중심점에 고산정은 위치하고 있다.
청량산은 빼어난 절벽의 미학을 보여주는 산이다. 청량산 육육봉이라고 하였던가? 그 봉오리들은 모두가 절

벽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런 절벽바위들은 청량산의 중심부에 몰려서 있고, 중심부에서는 낙강

의 발치에까지 나와 일선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런 청량산 중심부의 미학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계속되지만,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쯤

내려오다 보면 절벽바위는 슬며시 사라지고, 산은 물길로부터 멀리 떨어져 경사진 기슭을 완만하게 펼쳐낸다. 물은 여전히 수량 풍부하게 흐르지만, 신선같은 바위절벽의 옹위를 받지 못하니, 이제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속기를 드러낼 따름이다.


그러나 청량산과 낙강은 둘이 만나 이루어냈던 선계의 화음을 과거의 일로 추억하고만 있기에는 너무 자랑

높은 산과 물이다. 그 산과 그 물이 어찌 평범함 속에서 만족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의 가슴속 자랑은 평범함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일상성에 대한 반역을 시도한다. 물은 산 쪽으로 파고

들고, 산은 그서에 맞서서 물을 향해 절벽을 밀어올린다.

그리하여 청량산 중심부에서 이루어졌던 미학, 절벽 바위와 그 발치에 찰랑이며 흐르는 물길의 미학, 바로

그 선계의 화음이 규모를 줄여서 재현되는 것이다. 그것이 고산정 주변의 자연이다.

작은 청량! 그렇다. 고산정 주변의 자연은 청량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부끄럽지 않은 품격을 갖추고 있다.


고산정의 미학은 바위 절벽과 너른 물웅덩이로부터 온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관계가 증발하면, 존재도 없다.

관계는 모든 것을 있게하는 형식적 토대이며, 모든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비밀의 암호이다. 인간의 경우에도 그러하고,

자연의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산정의 아름다움 역시 그것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주변 자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물로부터 온다.


정자는 선비문화의 전형이다. 정자를 생각하면 양반보다는 선비

가 먼저 떠오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정자가 마음 닦기, 자연을 닮은 마음 만들어가기의 대표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물론 정자가 양반을 떠올리게 한다면, 정자의 기능도 조금 다른 쪽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여유 즐기기, 음풍농월하기 등에서 말이다.


그러나 음풍농월하기, 여유 즐기기는 세간의 기방 같은 곳에서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굳이 자연 속으로 깊숙이 걸어들어가는 정자의 문화는, 설령 즐기기의 문화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세속적 즐기기와는 다른 형식의 즐기기, 마음의 평화와 여유 즐기기를 목적하는 의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자는 특권계급을 뜻하는 양반이라는 이름보다는 유학적 인격을 닦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 선비라는 이름과 잘 어울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정자는 유학적 지식인에게 있어서 자연 닮기의 전초기기이므로, 그 주변 자연이 얼마나 사람들로 하여금

속기를 떨쳐내게 하는 감화력을 갖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살펴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이 점에서 고산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장점을 갖추고 있다. 주변 자연과의 관계가 고산정을 일상

의 영역으로부터 차단하여 선계의 변경으로 차원이동을 하여 주고,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을 서늘한 물빛과

푸르른 산 기운으로 말갛게 씻어서 신선의 마음가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고산정 주변에 이르렀을 때, 먼저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물길 양편에 치솟아 있는 촛대바위이다.

촛대바위 하나는 고산정의 서쪽, 막 동행을 시작하는 산의 끝에 나와서서 그 서쪽 발치로 휘도는 물길에

발을 담그고 우뚝 서 있고, 다른 하나는 동행을 시작한 물길의 남쪽, 고산정의 건너편에 외따로 서 있는 작

은 산의 북쪽 끝으로 나와서서 고산정을 바라보며 깊은 소의 물가에 발을 적시고 서 있다.


두 개의 촛대바위는 그렇게 조금 거리를 띄워 물 양쪽에 버티고 서서, 마치 물길을 인도하는 장수같기도 하

고, 여기 좁직하게 펼쳐지는 분지의 안녕을 지키는 파수꾼 같기도 한 모습을 드러낸다. 위엄스럽게, 그리고

수려한 자태로... 그리하여 고산정 주변의 땅과 하늘은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차단되고, 선계의 영역으로의

비상을 이루어낸다.

절벽바위 둘의 수려한 품격이 별다른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는 조물주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제로 두 개의 절벽바위만으로 이루어진 변모는 아니다. 절벽바위와 더불어 그 주변의 자연

전체가 참여해서 이루어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산정 남쪽의 절벽바위가 그 발을 적시고 있는 소의 물은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낙강의 물길은 거의 직선으로 내려 흐르다가 고산정 분지 안에서 일단 동쪽으로 휘돈다.

물길이 동쪽으로 휘도느라고 급한 각도를 이루며 흙을 파내고, 넓은 영역에 걸쳐 깊은 소를 이루었다.

두 개의 절벽바위 중 하나,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절벽바위는 그 소의 한쪽을 지키고 섰고, 고산정은 얼마

쯤 떨어진 북쪽의 산기슭에서 소를 내려다 보고 서 있다.


소의 물은 푸르다. 고산정 앞쪽으로는 물이 얕고, 물과 고산정 사이에는 넓은 백사장이 마련되어 있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모래가 어우러져서 기분좋은 색감을 연출한다. 물결은 바람따라 넘실거리고, 물가 고운

모래밭에 부딪혀 찰랑댄다. 양쪽으로 벌려 서 있는 퇴적암의 높은 절벽바위 사이를 휘돌아 나가는 물길은 넓고, 깊다. 물의 폭은 약 50미터 정도 될까? 고산정 앞, 모래와 잘 탁마된 자갈이 뒤덮고 있는 백사장 영역은

한 30미터 정도 되는 성 싶다.


고산정의 앞마당에 서거나, 고산정 아 마루에 앉으면, 서쪽의 촛대바위 하나만을 제외하고, 주변자연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온다. 고산정의 앞쪽 문틀을 걷어올리면, 고산정은 그 고적하고 정갈한 산천의 중심부로 녹아든다. 눈 앞을 고산정의 축대 아래쪽, 백사장의 북쪽 끝에서 백사장 쪽을 향해 45도 각도를 그리며 몸을 굽히고 서 있는 커다란 홍송의 성긴 가지들이 막고나서는 것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다. 선계를 옮겨다 놓은 듯한 자연의 순결한 숨결이 우리의 의식을 말갛게 순화시켜, 우리는 한 방울 이슬방울처럼, 한줄기 들바람처럼 자유

로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고산정과 금난수


고산정은 금난수의 정자이다.


"경북 유형문화재 274호 도산면 가송리. 이 집은 조선중기의 학자 성성재 금난수(1530-1604)공의 정자... 그의 나이 35세 되던 명종 19년(1564)에 건립하여 일동정사라고 하였다가 고산이라는 산명을 따서 고산정이라 부르게... 공의 스승인 퇴계 이황선생이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여 자주 찾아와 산천을 즐겼다고... 고산정은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다..."


안내판의 기록이다.


금난수는 중종 15년에 예안현 부라리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선조들은 대대로 보오하에 거주하였다. 선생의 고조이신 안찰사 영동정공(휘: 숙)이 처음 부포에

옮겨 살았다."


금난수는 7살에 부친에게서 소학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특별히 따로 스승을 두고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12세 때의 일이다. 이때 그는 외숙인 어은 남개신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청계 김진에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청계 김진은 부암 곁에 서당을 짓고 자제와 인근의 자제들을 같이 가르치고 있었는데, 금난수도 여기 참여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21세 때 횡성조씨를 취해 장가를 드는데, 부인은 월천 조목의 매씨였다.

그리고 이해, 금난수는 월천 조목의 손에 이끌려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게 된다. 이황의 계당시대 제자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금난수는 생원시를 통과하였고, 조정에 천거되어 참봉으로부터 봉화현감에 이르는 벼

슬살이를 하였다. 그는 75세의 나이로 고행집에서 타계하였으니, 특별히 장수하였던 셈이다.

금난수는 25세 되던 해에 동계에다가 집을 짓는다. 이 집은 성성재라고 이름 붙여지며, 이황은 성재라는 편

액을 써서 보내준다.


"그는 이기변을 지어 선생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마음을 잘 다스려 항상 때어있도록(성성) 하라는 말씀

이 있게 되었다. 또 동계 위에다 성성재를 신축하였는데, 이황은 손수 성재라는 편액과 임경대, 풍호대, 총춘대, 활원당 등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다."


안병걸 교수가 《안동시사》에서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금난수는 성성재로 만족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10년후, 그러니까 그의 나이 35세가 되던 해에 고산정을 짓는 것일 터이다.


"가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문집》의 년보에 적혀있는 말이다. 이 구절의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작은 글씨로 씌여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고산정이다. 치솟아 있는 절벽을 끼고 깊은 물 웅덩이를 내려다보니, 수려하고 깊고 그윽하여 선성 명승 중의 하

나이다. 선생은 항상 경전을 끼고 들어가 머물었는데, 고요함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 정자를 일동정사라고 하기도 하고, 고산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다 그 주변의 지명을 취한 결과이다.

그러면 정자의 주변 중 어디가 일동이고, 어디가 고산인 것일까?


"갑자년에 일동정사를 지었다. 그 곳은 푸른 절벽이 치솟아 있고, 고산과 대치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징담이 있어서

작은 배를 갖추고 위 아래로 노닐며 흥취를 돋울 수 있으니, 낙강의 명승 중 한 곳이다."


문집의 《유사》속에 보이는 글이다.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고산정 건너편에 따로 서 있는 작은 산이 고산이고, 그 앞의 깊은 소가 징담이라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산정이 자리잡고 있는 산이 일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점도 추측할 수 있다.


고산정은 정면 3간, 측면2간으로 동서로 8미터 정도, 남북으로 5미터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북쪽을 제외하고 다른 3면은 3쪽으로 송판을 이은 쪽마루를 두르고, 난간을 붙였다. 난간은 이중으로 처리

되어 있다. 쪽마루에서 직선으로 판자를 붙여 올리고, 그 위쪽에는 둥근 모양의 가는 가로대를 질렀다.

수직으로 붙여 올린 판자의 아래쪽 면에서 안으로 굽어지며 감아 오르는 오리발을 대었는데, 오리발은 수직

판자 위쪽의 난간 밖으로 솟구쳐 올라 그 보다 조금 높은 곳에까지 이르고, 거기 다시 둥글게 처리된 가는

가로대가 있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가로대가 평행선을 그리며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고산정은 3영역으로 나뉘어진다. 동쪽에는 통으로 열린 긴 방이 마련되어 있다.

서북쪽 귀퉁이에는 그 반절 정도 되는 작은 방이 있다. 그 나머지 부분은 다 마루이다.

마루에는 흙이 쌓여있고, 마루 동쪽 방의 천장 쪽 지붕은 조금 허물어져 있다. 마루 서남족 벽에는 위쪽으로

긴 광창이 누워있다. 광창의 마름모꼴 창살을 통해서 고산정 서쪽 편의 바위와 나무, 하늘의 한 쪽이 토막토

막 나뉘어져 보인다. 그 아래쪽의 나무문 판자 위에는 누군가가 크레용으로 시조를 써 놓았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고산정은 물 속으로 빠져들고

마루방 안에 앉으니 한낮인데도 시원하다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 않은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밖에는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가득하다. 굽어진 산자락에 쌓여 있어서

바람이 불어들지 못할 것도 같은데, 고산과 징담을 휘돌아 온 바람의 한 자락이 문

사이로 슬몃 끼어들기도 한다.


앞쪽 문을 열어놓으면, 굳이 마루방에서 몸을 일으킬 것도 없이, 앉은자리에서 시선

은 백사장의 한쪽과 그 건너 깊은 물, 그리고 그 너머에 홀로 떨어져 있는 촛대바위 사이를 맴돈다. 낙강의 물은 북쪽 청량산으로부터 직선으로 흘러내려 힘들게 동쪽으로 몸을 틀면서 징담을 이루어내고, 징담의 촛대바위 아래, 깊은 물그늘 속에서 잠시 휴식하였다가 동쪽을 향하여 흘러간다.


그러다가 얼마쯤에서 다시 휘돌아서 서행을 하고, 또 한번 휘돌아서 남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숨가쁜 몸짓이

어찌 쉽게 손바닥을 뒤집듯이 이루어질 수 잇는 것이겠는가? 고통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리라. 징담의

푸르른 물은 그 고뇌의 흔적이기도 하고, 그 고통스러운 노력에 주어진 보답이기도 하다.


푸른 바람이 시야 속으로 불어든다. 바람은 촛대바위를 휘감고 흐르다 그 한자락을 슬쩍 징담의 수면 위에 드리운다. 푸르르! 바람에 들깨워진 징담의 물비늘들이 소름이 끼치듯이 돋아난다. 징담 위에는 수천, 수만조각의 물비늘들이 몸을 일으키고, 세상은 그 숫자 정도로 나뉘어져 조금씩 흔들린다. 아니면 그 숫자 만큼의 세상이 물결 위에 떠올라 춤을 춘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람은 제 갈길로 가고, 물결도 숨을 죽인다. 남는 것은 내 마음에 일었던 파랑 뿐이다. 그러나 내 마음에 일었던 파랑은 흔들리는 바깥 세상이 지어낸 것, 바깥 세상이 숨을 죽이면 저절로 사그라져 버리고야 말 운명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내 마음의 이랑에도 평화가 찾아든다. 고요함! 한 없는 종요로움! 시간이 흐르는 소리

도 들리지 않고, 내가 여기 앉아있다는 의식조차도 퇴색되어 버린다. 나의 시선은 사선으로 내려다 보이는 징담의 깊은 물에 포획되고, 그 주변에 내려서 있는 태고의 숨결 속에 녹아든다. 고산정에 앉아서, 고산정을 등

에 지고, 나는 그 깊은 징담의 물 속을 유영하고 잇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즐겁고, 자오롭게. 또는 아무 의식

도 없이 투명하게.


시간도 흐름을 멈추고, 존재조차도 사라져버린 자리에 욕심이 어떻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세속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것, 삶의 남루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그 속에서 평화로운 것,

그것이야말로 공부하는 자의 목표일 것이다.

이 방에서 저 징담의 물과 고산의 바위절벽을 내려다보며 금난수가 배우고자 했던 것도 그것일 터이고,

노년의 쇠락한 몸을 이곳을 찾아 즐겼던 이황이 이루고자 했던 것도 그것일 터이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봄날
산 속에 드니
물 빛깔과 산 색깔이
화폭 속에서 번져나네.
정자 위에 올라 한가롭게 노래함에
속진이 다 떨어져 나가네.
아름다운 친구와 같이 하지 못하는 것만이
안타까울 따름일세.




금난수의 <고산에서 우연히 얻은 시: 고산우음>이다.


고산정 속에 앉아서 금난수는 그렇게 자유롭고, 그렇게 평화로웠다.

오래 뒤에 고산정을 찾아온 내게도 고산정은 잠시의 평화, 잠시의 자유를 준다. 금난수가 벗과 같이하지

못함을 한탄한 것처럼, 나도 그 자유와 그 평화가 오래 나의 것이 되지 못함을 한탄할 수 밖에 없지만 말

이다.<안동>

글/윤천근

출처 : 선바우
글쓴이 : 정수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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