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口笑時渾似品
(개구소시혼사품)
이번에는 김삿갓이 운이 좋아서
과객접대를 잘하는 부잣집 사랑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런데 주인은 보이지 않고 객들만 둘러앉아서
질펀한 잡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야기인즉 주인영감은 복이 많아서
그 나이에 젊은 처첩을 거느리는데
치마폭을 떠나지 못해
항상 사랑보다는 안방을 좋아할 뿐 아니라
괴팍한 성미라서 그런지
고대광실 그 많은 방들을 다 놔두고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를 한 방에 데리고 산단다.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김삿갓은
하마터면 폭소를 터뜨릴 번했다.
불현듯 두 마누라를 좌우에 누여 놓고
자는 광경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즉석에서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단숨에 휘갈겼다.
不熱不寒二月天(불열불한이월천)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월 좋은 때에
一妻一妾最堪憐(일처일첩최감련)
마누라와 첩이 정답게 누워 있네.
鴛鴦枕上三頭竝(원앙침상삼두병)
원앙 금침엔 머리 셋이 나란히 있고
翡翠衾中六臂連(비취금중육비연)
비단 금침 속에는 팔이 여섯이로다.
開口笑時渾似品(개구소시혼사품)
입을 벌려 웃으면 세 입이 品(품)자 같고
側身臥處恰如川(측신와처흡여천)
몸을 돌려 누우면 세 몸이 川(천)자 같으리.
纔然忽破東邊事(재연홀파동변사)
동쪽에서 하던 일 끝나기가 무섭게
又被一擧打西邊(우피일거타서변)
서쪽으로 옮겨가 또 한판 해야 하네.
懶 婦
無病無憂洗浴稀 무병무우세욕희
병도 없고 걱정도 없는데 목욕도 자주 안하고
十年猶着嫁時衣 십년유착가시의
10년동안 그대로 시집 올 때 옷을 입고 있네.
乳連褓兒謀午睡 유련보아모오수
포대기에 젖물린 아기가 낮잠 들기를 바라다가,
手拾裙蝨愛檐暉 수습군슬애첨휘
이 잡으려고 치마 걷어들고 햇볕드는 처마로 나왔네.
動身便碎廚中器 동신편쇄주중기
부엌에서 몸만 움직였다하면 그릇을 깨고
搔首愁看壁上機 소수수간벽상기
벽에 베틀만 쳐다보면 현기증 나서 머리만 긁어대네.
忽聞隣家神賽慰 홀문린가신새위
그러다가 이웃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柴門半掩走如飛 시문반엄주여비.
사립문을 반쯤 닫고서는 나는 듯이 달려가네.
김삿갓(金炳淵) 1807(순조7)~1863(철종14)
본관은 안동.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그의 일생은 여러 가지 기록과 증언들이 뒤섞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평안도농민전쟁 때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로 처형당하자, 그는 황해도 곡산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했다가
사면되어 부친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화병으로 죽자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그는〈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
이라는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그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라는 세상의 멸시를 참지 못해 처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자신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방랑했으며,
그의 아들이 안동·평강·익산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도망했다고 한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현의 어느 땅(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살았고, 그뒤 지리산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그의 시는 몰락양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으로 당시 무너져가는 신분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풍자와 해학을 담은 한시의 희작(戱作)과, 한시의 형식에 우리말의 음과 뜻을 교묘히
구사한 언문풍월이 특징이다.
구전되어오던 그의 시를 모은 〈김립시집〉이 있다.
1978년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 기슭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강원도 영월에도
전국시가비동호회에서 시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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