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의 역사
건립
1519년 조선중종 때(조선중기) 이명이 임청각 건립
계승
18세기 11대 종손 허주 이종악(1726년~1773년)이 집주인이 됨
독립운동의 산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선생의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하는 등 3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입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
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망명 직전에는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습니다.
만주 망명길에 오른 2년 뒤인 1913년에는 아들 이준형에게 “조선으로
(국내로) 들어가 임청각을 처분하라”고 하였으며, 그 후 국내로 들어온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고 하자, 문중에서 이를 말리면서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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