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 articleno = "16153861";

동계냇가 암벽에 이끼가 많이끼어있다

동계정편액은 미수 허목의 글씨라고 한다




동계천
동계정 (東溪亭) 대구시 동구 둔산동 391번지
백불암의 아들 東溪 崔周鎭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로서, 자손들의 강학 장으로 이용하였다.
동계정 편액은 미수 허목(眉? 許穆, 1595 ~ 1682]). 허목의 글씨.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세자익위사익찬지려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 行御侮將軍世子翊衛司翊贊之閭)

대구 둔산동 옻골마을 동계정과 정려각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百弗庵 崔興遠(1705-1786)은 경주최씨 匡靖公派(광정공파) 鄲(단)을 중시조로 하고,
현재 둔산동 옻골에 1616년에입향 정착한 臺巖 崔東?(1586-1622)의 후손이다.
百弗庵 崔興遠은 字를 太初·汝浩라 하였고, 初號를 數咎庵이라 하였다가 말년에 百弗庵이라 하였는데,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로 후에 漆溪선생이라 하였다.
백불암은 학문을 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한 것이 부인동 향약을 10여년 넘는 동안 실시하였고,
先公庫, 恤貧庫를 설치하여 동민들을 승화시키고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백불암이 향약은 大山 李象靖(1710-1781)과 南野 朴遜慶(1713-1782)과 더불어 ‘嶺南三老’로 추앙되고 있던
학문적 명성과 더불어 朝野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이 되었고, 1782년(정조 6) 정악원 주부를 거쳐 1784년(정조 8)에 世子翊贊이 되었다.
그는 부친의 병한 중에도 대변을 맛 보아가면서 탕제를 조절했던 효자였으며,
사후 3년만인 1789년(정조 13) 6월에 나라에서 孝行으로서 旌門을 명 하였다.
백불암은 효의 실천으로 후세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은 그 처음 근원이 효도에 있었다"고 言行錄에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