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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냇가 암벽에 이끼가 많이끼어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16964A4EC5EC1E28)
동계정편액은 미수 허목의 글씨라고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16814A4EC5EC1F27)
![](https://t1.daumcdn.net/cfile/blog/1411B04A4EC5EC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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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천
동계정 (東溪亭) 대구시 동구 둔산동 391번지
백불암의 아들 東溪 崔周鎭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로서, 자손들의 강학 장으로 이용하였다.
동계정 편액은 미수 허목(眉? 許穆, 1595 ~ 1682]). 허목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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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 행어모장군세자익위사익찬지려
(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 行御侮將軍世子翊衛司翊贊之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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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둔산동 옻골마을 동계정과 정려각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386번지 일원
百弗庵 崔興遠(1705-1786)은 경주최씨 匡靖公派(광정공파) 鄲(단)을 중시조로 하고,
현재 둔산동 옻골에 1616년에입향 정착한 臺巖 崔東?(1586-1622)의 후손이다.
百弗庵 崔興遠은 字를 太初·汝浩라 하였고, 初號를 數咎庵이라 하였다가 말년에 百弗庵이라 하였는데,
조선후기 영남의 대학자로 후에 漆溪선생이라 하였다.
백불암은 학문을 하면서 사회적 실천을 한 것이 부인동 향약을 10여년 넘는 동안 실시하였고,
先公庫, 恤貧庫를 설치하여 동민들을 승화시키고 생활안정을 도모하였다.
백불암이 향약은 大山 李象靖(1710-1781)과 南野 朴遜慶(1713-1782)과 더불어 ‘嶺南三老’로 추앙되고 있던
학문적 명성과 더불어 朝野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교관이 되었고, 1782년(정조 6) 정악원 주부를 거쳐 1784년(정조 8)에 世子翊贊이 되었다.
그는 부친의 병한 중에도 대변을 맛 보아가면서 탕제를 조절했던 효자였으며,
사후 3년만인 1789년(정조 13) 6월에 나라에서 孝行으로서 旌門을 명 하였다.
백불암은 효의 실천으로 후세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은 그 처음 근원이 효도에 있었다"고 言行錄에 기록하고 있다.